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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섭은 화서 이항로를 거쳐 고산(鼓山) 임헌회(任憲晦)에게 배웠으며, 호는 오남(吾南)이었다. 장흥의 농민군 대접주 이방언과 동문수학한 사이였다. 1838년 장흥 흥룡동(현 부산면 내안리)에서 출생한 오남 김한섭(吾南 金漢燮)은 1877년에 금릉 대명동(大明洞: 현 강진군 성전면 송월리 대월마을)으로 이사하여 서재를 짓고 강학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1887년부터는 보암면 수양리(현 신전면 수양리)로 옮겨 강학 활동을 계속하였다. 1892년 12월에 강진향교 장의(掌議)에 임명되고, 1894년에는 이방언이 동학에 입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타이르는 글을 보냈으나 끝내 듣지 않자 절교한다는 글을 다시 보냈다고 한다. 또한 4월부터는 동학 전파를 방지하기 위하여 박기현(朴冀鉉), 김병휘(金柄輝) 등과 향약계를 조직하고 동학을 경계하는 글을 지어 사람들을 효유하기도 하였다. 이후 강진에서 민보군이 조직되자 그 수장이 되어 민보군을 이끌었으며, 1894년 12월 7일 장흥과 강진, 북쪽에서 후퇴해온 농민군이 합공한 강진성 전투 당시 강진 수성군의 민보군 지휘자로 농민군에 맞서 싸우다 전사하였다. 오하기문에는 “의병장 김한섭이 전사했으며 그 제자인 김형선(金亨善)을 비롯하여 사인(士人) 김용현(金龍鉉), 좌수 윤종남(尹鍾南), 현리 김봉헌(金鳳憲), 황종헌(黃鍾憲)도 같이 전사하였다”고 하였다. 출처 :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