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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 입성 전투에 앞장서 참여하였다. 이해 6월에 집강소(執綱所) 활동이 시작되자 최승우 도접주와 함께 임실 도소(都所)를 설치하고 온갖 폐정을 바로잡는 집강 업무를 수행하였으며 이어 7월 15일 남원대회에 동지들을 이끌고 참여하여 동학농민혁명의 기세를 올렸다. 7월과 8월 사이에는 임실 동학농민군 3천여 명을 이끌고 처절한 남원성 전투를 이끌었다. 2차 봉기가 일어날 시기인 10월 중순 전봉준 장군이 공주성을 공격하고 김개남 장군이 청주성을 공격할 때 양쪽에 병력을 나누어 보내고 최승우와 함께 남우너성을 지켰다. 11월 14일 민보군과 벌인 운봉전투에서 패전하고 이어 일본군이 들어오자 최승우 등 10여명의 접주들과 함께 회문산 속으로 들어가 6년동안 숨어살았다. 김영원 선생은 1900년경부터 동학 재건운동에 나섰으며 나라가 망해가자 상투머리를 자르고 교육운동에 나섰다. 평새으이 동지인 최승우(崔承雨) 선생의 지원을 받아 1904년 갑진(甲辰)년 전주에서 창동학교(昌東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을 맡았으며 이어 1906년 임실군 청웅면에서 삼화학교(三和學校)를 설립하여 교장을 맡아 정열적인 교육자의 길로 나섰다. 창동학교와 삼화학교는 삼요정의 전통식 교육을 지양하고 근대식 개화교육으로 전환하였다. 마침내 나라가 일제에 병탄되자 김영원 선생은 비분강개하여 3일동안 단식하면서 일제에 항거하였다. 이때 아버지의 뜻을 충실히 받들던 장자 교민(敎民)이 분사하는 가정의 불행마저 겪었다. 천도교 본부에서 삼일만세운동을 계획할 때 이에 동참하여 박준승(朴準承) 양한묵(梁漢默) 등 두 제자를 민족대표 33인으로 내보내고 자신은 노구를 이끌고 내려와 전라북도의 만세운동을 주도하고 이어 임실군의 책임을 맡아 임실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김영원 선생의 수많은 동지와 제자들이 전주와 임실 등지에서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김영원 선생은 주모자로 일제 경찰에 체포되어 전주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받은 끝에 1919년 8월 26일에 옥사하셨다. 김영원 선생은 67세의 노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애국애족의 정신으로 일선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장렬하게 순국하였던 것이다. 그의 혁명 정신은 삼혁당이라는 호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삼혁당은 첫째 반봉건 반침략의 기치를 내건 동학농민혁명에 뛰어들었고 둘째 머리를 깎고 새로운 역사 대열에 동참하였고 셋째 민족독립을 위해 삼일만세 운동을 전개하여 세 번에 걸친 혁명을 이룩하였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일제는 이 거룩한 정신을 훼손하려 끝내 1921년 무도하게도 민족 교육의 요람인 삼요정을 강제로 헐어버렸다. 김영원 선생의 민족교육운동은 삼요정에서 출발하였으니 삼요정은 선생의 혼이 응결되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삶의 지표가 될 것이다. 더욱이 이곳에서 민족대표인 박준승 양한묵 등 두 애국자와 수많은 독립지사를 길러냈으니 민족의 표상이 되고도 남을 것이다. 우리 후손들은 애국애족의 민족정신을 이어받아 조국통일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이제 헐어진지 80여 년 뒤에 이 고장의 뜻있는 인사들이 삼요정을 복원하여 자라나는 후손들에게 애국정신의 징표로 삼으려 하니 이를 기리는 바이다. 2002년 여름에 선열의 정신을 받들어 통일을 염원하며 이이화(李離和) 삼가 사적을 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