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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만세운동의 정신적 지주 김영원(金榮遠) 선생 / ○ 관리자 : 임실군 동학농민혁명 유족회 3.1독립만세운동의 정신적 지주인 삼혁당 김영원 선생은 철종4년(1853) 8월 5일 임실군 운암면 선거리 시목동에서 부 김성집과 모 진주하씨 사이에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화경 도호는 원암이며 세 번째 호는 삼혁당이다. 본관이 경주인 김영원 선생은 3살 때 부친을 여의고 15살에 모친마저 별세하였다. 그러나 유년기부터 농사일을 하면서도 주경야독하는 향학열로 그의 학문은 제자백가설에 이르렀다. 김영원 선생의 학문은 20세를 전후하여 유학자로서의 자리를 잡았으며, 고종 15년(1878) 26세때 정읍군 칠보의 무성서원 장의로 선출되었고, 이듬해에 전라도 서원의 색장이 되었다. 김영원 선생은 이 무렵 대과에 급제한 웅지를 품었으나 뇌물과 매수로 합격되는 부정부패를 보면서 통분해하엿으나 모든 것을 접고 올바른 민족정신과 애국 교육을 위한 후학 양성에 매진하였다. 선생께서는 1883년(계미) 봄에 사재를 털어 우국우민의 일념으로 고향인 선거리 시목동 선무봉 아래에 기미면 3.1독립만세운동의 중심지였던 삼요정을 세웠다. 김영원 선생의 우국우민 정신은 삼혁당이라는 호에서도 잘 나타나는데 삼혁은 첫째, 반외세, 반봉건의 기치를 내건 동학혁명에 참여하였고, 둘째 1904년(갑진)에 자신의 머리를 깎고 스스로를 혁명하였으며, 셋째 민족 독립을 위해 3.1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여 세 번의 혁명을 이룩하였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임실지역 3.1독립운동의 중심지였던 '삼요정'이라는 이름은 첫째 산과 물이 잘 어울려 자연환경이 좋은 곳이고, 둘째, 학문을 연마하기에 좋은 곳이며, 셋째 애국정신을 고취하기에 좋은 곳이라는 뜻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삼요정은 김영원 선생의 우국우민의 이념을 실천하기 위한 민족교육의 출발점이었다. 따라서 1904년(갑진)에 전주에 창동학교를, 1906년에 청웅면 고구리에 삼화학교를 건립하여 근대 개화교육의 선봉이 되기도 하였다. 김영원 선생은 삼요정의 문하생이었던 박준승, 양한묵 등 두 제자를 3.1독립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케 하였고 그 자신은 전라북도 3.1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임실지역 책임을 맡아 동지들과 함께 삼요정에 모여 비밀연락 및 행동요령 등을 밀의하고 실행에 옮기다가 왜경에 체포되어 1년형을 선고받았다. 뒤이어 체포된 동지들이 왜경의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주모자가 김영원이라는 자백으로 인하여 선생은 다시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안타깝게도 1919년 8월 26일 순국하였다. 민족교육의 요람인 삼요정은 김영원 선생의 옥중 순국 후 독립운동의 발상지라는 이유로 일제에 의하여 1921년 강제 철거되고 말았다. 임실군에서는 김영원 선생의 민족교육과 애국애족의 발상지요 살아있는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삼고 그 숭고한 뜻을 기리고자 2002년 10월 29일 이곳에 삼요정을 복원하였으며, 정부에서는 김영원 선생의 애국애족정신을 기리어 1919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그 후 국가보훈처에서는 2003년 12월 8일 삼요정을 현충시설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