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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장공 양대박 장군 임진왜란 운암 승전비 / 해설문) 산천이 험하고 저습지대라 말들은 서로 달리지 못하고, 군사들은 무술을 펴지 못한 곳에, 나는 가고 적은 와서, 적음으로 많음을 대적하고, 약함으로 강함을 항복 받으니, 군병을 善用(선용)한 자 뜻을 얻은 땅이요, 制勝(제승)의 기회를 운용한 곳이다. 그러므로 殽(효) 땅에 二陵(이릉)이 있어 孟明(맹명)이 패하고, 鼓(고) 땅에 井陘(정형)이 있어 韓信(한신)이 이기니, 이는 어찌 양장군이 운암에서 倭를 격파한 바가 아니랴. 옛날 임진년 倭奴(왜노)의 난에 의병을 일으키고 가산을 기울려 호남의 자제들을 규합하고 격문을 각 고을에 보내어 바람을 일으키니 군대의 소리 드디어 일어나다. 둘째 아들 형우와 함께 장사 천 여 명을 거느리고 남원으로부터 전주로 갈 적에 葛潭驛(갈담역)에 이르러 앞서 간 자가 위급함을 아뢴지라, 당초에 장군에게는 烏龍(오룡)이란 말이 있어 능이 하루에 오백리를 달리더라. 보건대 왜노 군사 萬餘(만여)가 운암 장곡 중에 진을 쳤으므로 장수들이 군을 멈추고 그 예봉을 피할 것을 청하니 장군이 칼을 만지며 웃어 말씀하시기를, 대열을 이루지 못할 적에 나아가 한 번 싸우면 공을 거둘 것이니라. 군을 2대로 나누어 1대는 형우를 장수로 산 서쪽에 복병하고, 1대는 장군)이 직접 栗峙(율치) 아래로 다가가니 이 때를 당하여 왜노가 취사도구를 벌려 놓고 밥을 지어 미처 먹지 못한지라. 장군이 칼을 빼들고 크게 호령하여 장사들을 지휘하며 사력을 다하여 싸우고 형우는 산 서쪽에서 바로 가운데를 뚫어 북을 치며 같이 공격하고 장군은 손수 50명의 적을 사로잡고 살상한 자 천명이 넘으니 왜노가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장군이 大樹(대수)를 깎아 글을 쓰되 만력 임진 6월 25일 장군 梁大撲(양대박)이 倭奴(왜노)를 여기서 대파하다하니 大撲(대박)은 곧 장군의 이름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장군이 죽기 전 꿈에 하늘에 올라가 神兵(신병)으로 어려움을 구원할 것을 청하여 어려움을 이겨낸 고로 사람들이 신이라 하더라. 아! 九地之法(구지지법)(손자병법)을 밝히고 萬夫(만부)의 용맹을 사서, 마을의 농사꾼을 모아 바위 험하고 위급한 장소에 배치하여 적으로 하여금 앞뒤를 서로 구원치 못하게 하고, 위아래를 서로 수습치 못하게 하여 예봉을 꺾고 精兵(정병)을 소멸하여 감히 다시는 완산을 엿보지 못하게 하고, 작은 한 몸으로 동남을 막아 호위하여 높게 군사상 중요지를 지키니, 나라가 의지하여 중히 여기고 백성이 믿고 두려움이 없게 한 것은 바다로 둘러쌓인 우리 東土(동토), 三(삼) 수백 년에 오직 장군 한 사람이다. 나 일찍 호남에 이르러 운암을 보니 비록 벽촌이지만 늙은이들이 왕왕 그 사실을 전하며 울먹인 자 있더라. 이제야 그 功烈(공렬)이 만물에 많이 미쳤음을 믿고 충성과 의리, 사람을 감동함이 깊었도다. 나 이에 수레에서 내려 서성거리며 오래도록 가지 못하였다. 이른 바 伐亭(벌정)은 곧 大樹(대수)의 빈 터였다. 대수는 바람비로 없어지고 돌에 새겨 장차 그 나무를 대신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