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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명균(申明均, 號:珠汕)은 1921년 12월 3일 서울 휘문의숙(徽文義塾)에서 조선어연구회(朝鮮語硏究會)가 조직될 때 참여하였다. 1922년 5월 9일 조선교육협회 제2차 정기총회에서 이사로 선임되어 활동했다. 1923년 3월 24일 개최된 전조선청년당대회(全朝鮮靑年黨大會)에 대종교(大倧敎) 중앙 측 준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같은 해 5월 10일 조선민립대학기성회 경성부(京城部)가 설치될 때 집행위원으로 선임되어 활동하였다. 1924년 5월 중국 헤이룽장성(黑龍江省) 영고탑(寧古塔)에 있는 대종교 총본사에서 개최된 교의회(敎議會)에 경성대종교(京城大倧敎) 위원으로 참석하였다. 같은 해 6월 조선교육회관에서 개최된 제1회 및 제2회 언론집회압박탄핵회(言論集會壓迫彈劾會)에 위원으로 참여하여 일제의 언론집회 탄압에 항거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로 인해 같은 해 6월 20일 일본 경찰에 검속되었다가 이틀 뒤인 6월 22일 풀려나기도 했다. 1927년 2월 조선어 발달과 일반의 지식 향상을 위해 한글사(한글社)를 설립한 후 잡지 『한글』의 편집 겸 발행인으로서 한글의 연구와 보급에 노력하였다. 1929년 3월 26일 개최된 조선소년총연맹(朝鮮少年總聯盟) 상무위원회(常務委員會)에 소년잡지 측을 대표하여 참석했다. 같은 해 11월 조선어사전편찬회에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연구부(硏究部)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1931년 1월 이중건(李中乾)과 함께 동회(同會)의 간사를 맡아 조선어사전 편찬에 노력하였다. 뿐만 아니라 1931년에는 청년상식총서(靑年常識叢書)로 『조선역사(朝鮮歷史)』를 출판하는 등 다방면에 걸쳐 국학운동을 펼쳤다. 1930년대 초 동덕여자고등보통학교(同德女子高等普通學校)에서 ‘조선어’를 가르칠 때는 학생들의 반제투쟁인 맹휴(盟休)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지하기도 했다. 1931년 1월 10일 조선어연구회가 조선어학회로 개칭된 후 1932년 1월 9일 간사장으로 선출되어, 다시 창간된 기관지 『한글』을 통해 ‘한글맞춤법통일안’ 제정 사업에 앞장섰다. 1933년 4월에는 조선어학회의 회계로 선출되어 활동했다. 1933년 『조선어문법(朝鮮語文法)』, 1934년 『조선어철자법(朝鮮語綴字法)』을 출판하여 한글의 우수성을 알리고 철자법 개정과 관련한 조선총독부 학무국의 관제안(官制案)에 대항하여 조선어학회안(朝鮮語學會案)의 과학성을 적극 홍보하였다. 같은 해 6월 이극로(李克魯)와 함께 순 한글 주간신문(週刊新聞)인 『서울시보』를 발간하였다. 이밖에도 출판사 중앙인서관(中央印書館)을 경영하면서 『신소년(新少年)』을 비롯한 잡지와 『시조전집(時調全集)』, 『주시경집(周時經集)』, 『가사집(歌詞集)』, 『소설집(小說集)』, 『백옥루』 등 조선문학과 관련한 다수의 전집을 편찬했다. 1937년 7월 일제가 중일전쟁을 일으킨 후 일제가 전시총동원체제를 확립하고 창씨개명(創氏改名) 등 본격적인 민족말살정책을 강화해가자, 이에 분개하여 1940년 11월 자결 순국하였다. 정부는 2017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