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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5 - 3월 15일 자유당 정권의 투표 부정에 반발한 학생과 시민들이 시위에 나서자, 경찰은 최루탄과 총기로 무차별 발포를 가하면서 수십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여기에 정부는 이 시위를 공산당이 배후에서 조종한 좌익 폭동이라고 발표, 마산시민들의 반발 을 고조시켰다. 그러다 4월 11일, 28일 동안 실종되었던 김주열 학생의 시체가 마산 중앙부두에서 떠오 르자, 이에 분노한 마산시민의 2차 시위가 발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산 의거를 도화선 으로, 시위는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이처럼 전 국민적 분노로 확대되면서 시위 목적도 부 정선거 무효뿐만 아니라 이승만 정권의 퇴진 자체를 요구하게 되었다. 4·19 혁명으로 이어지다 부정선거 무효와 이승만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전국적인 시위는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 생들의 시위에 이어 4월 19일 학생들과 일반 시민들이 가세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에 경찰은 또다시 무차별 발포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100여 명이 사망하였다. 여기에 이승만 정부는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지만 이러한 압박에도 시민들의 저항은 계 속되었다. 그리고 4월 25일 대학교수들의 시국 선언문 발표 등이 이어지자, 결국 이승만은 대통령 직을 사임하고 하와이로 망명하게 되었으며 자유당 정권도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