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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호 선생 댁에 편액 2개가 있었다. 사연을 여쭈어보니, 임진왜란 당시 선조이신 정사호 선생이 안동부사로 계실때 쓰신 것인데, 화곡의 증손 致相(치상)이 하양현감 부임 시 안동에 들러 화곡이 지어쓴 望海樓(망해루) 懸板詩(현판시)를 탁본한 것이 후손에게 전해졌고, 어르신께서 탁본만 남아있는 것을 안동 군수에게 전달하려고 문화재 복원사에게 요청하여 사비로 제작하셨다고 한다. 望海樓(망해루)의 次(차) 板上韻(판상운) 明(명)나라 병사들의 뒷바라지 苦難(고난)의 일이었다. 십년 그 옛 자취를 늙어 다시 찾았다. 다만 軍機(군기) 우레 같았음을 두려워하며 民怨(민원) 깊은 물 같았음을 일찍 알았다. 푸른 산 기약이 있으니 길 오히려 멀고 白髮(백발)에 時(때)를 걱정하니 이 素心(소심)이라 머리 돌려 서울을 바라보니 구름 밖이 넓은데 저녁 해 기울어진 망해루에 홀로 올랐다. 지난 정유년가(1597)에 (나) 이 고을 府使(부사)였었다. 그때 마침 명나라 장군 楊鎬(양호) 經理(경리) 麻貴(마귀) 提督(제독) 거느리는 10만 軍兵(군병)이 倭賊(왜적) 加藤淸正(가등청정)[가또 가요마사]의 軍行(군행)을 쫓고 있었는데 帳幕(장막)의 설비 군병의 식량을 이 고을에서 모두 맡아 해야 했었으니 그때의 이 고장 모든 이의 괴롭고 힘들었던 상황은 지금 생각해도 저절로 齒(이)가 시려옴을 느낀다. 이제 나 왕명을 받는 길에 다시 와 옛일 생각에 문득 이렇게 회포를 적는다. 丁未(정미-1607) 中秋(중추) 兼(겸) 巡察使(순찰사) 鄭賜湖(정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