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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사양하지 않았고 宮城遥拝(궁성요배)라고 日王(일왕)을 향하여 最敬禮(최경례)하는 사람들 앞에 나서 受禮者(수례자)를 자처하며 잘들 지내느냐 揶揄(야유)하는 것을 만년의 위안으로 하셨다. 일제의 토지측량 끝난뒤에도 일제법에 따를 수 없다 하여 家垈(가대) 田沓(전답) 林野(임야) 등기한 것 단1건이 없으셨다. 공 가시고 50년 勳功(훈공) 추서 15년에 醒齋公(성재공) 종손 英鎬(영호) 공의 산소를 성재공 묘소 左崗(좌강)으로 정하니 손 상호 어은곡에서 緬奉(면봉)하고 동두천시의 지원으로 공의 勳記(훈기)를 새겨 여기 묘소앞에 세우게 됨에 기록 사료들을 상고 공의 생애의 만일을 이렇게 적는다. 서기 2006년 6월 일 족손 인하대학교 명예교수 사단법인 하국어문회 이사장 문학박사 기호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