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日敵(일적)과 싸우고 뒤에 昌義韓北大將(창의한북대장) 연기우부대에 합류 경기 북서부 황해 남부 일대에서 혁혁한 전과를 올리셨다. 1909년 4월 17일의 경기지법 형사부 제231호 제285호 판결은 공이 首領(수령) 연기우 휘하에서 현학용 현학인 박천경 등 수십명과 헌병보조원을 매수 총탄을 다량 구입했고 1908년말까지 삭녕 연천 각군 민가에 침입 軍資(군자)를 조달했다 하여 5년형에 처한다했다. 1908년말까지의 전적으로는 1909년초 虜囚(노수)의 몸이되신 듯 몇해를 가혹한 고문에 굴하지 않고 의연히 일적의 무도함을 꾸짖으셨다는 家譜(가보)의 기록이다. 考 낙준공 위독하시어 지방민 수백이 연명으로 진정하고 일제 1910년 경술 8월에 끝내 이 나라를 병탄한 바라 그 여유로 10월에 공 가석방되었는데 나라 망하고 살아나오는것 부끄럽다고 옥문에서 통곡하셨다. 생환하여 稼穡(가색)으로 苟全性命(구전성명)밖에 일제치하에서 하신 일 없다. 일제의 패망을 기다리고 광복을 보시고 그리고 노구로 庚寅難(경인난)을 겪으시고 1956년 음 3월 14일 졸 향년 79 어음곡에 장했다. 졸후 35년 1990년 8월 15일 광복절에 노태우대통령 공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配여흥민씨 致明 女. 고종 신미 1871년 生. 1949년 음 4월 25일 79 춘추로 돌아가기까지 의병가내로 일제의 박해를 받고 가난에 근로하여 생계를 지탱하며 3자녀를 廉潔(렴결)하게 양육하고 일가우애 문중화목하게 하셨다. 공과 同兆(동조) 1남 용팔 경인난중 졸. 2녀...중략...의병을 가장한 汗黨(한당)에게 준엄했고 동료에게 상부상조 도타왔던 陣中(진중) 애기 지금도 전설로 회자된다. 先考(선고) 돌아가시고 반년에 출옥하여 상복입고 세곡에서 3년 廬墓(여묘)하셨다. 斗酒(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