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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임시정부 독립단 단원 및 흥사단 단우 142번 명산(明山) 김기만(金基萬, 1892~1956.12.27) 65주기 김기만의 본적은 평안남도 용강군 오신면 한학리이다. 1902년까지 출생지에서 살았다가 1905년까지 인근의 진남포에서 거주한다. 그러다가 1907년이 되자 또다시 출생지인 한학리에서 거주한다. 이 무렵까지 주변에 있는 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였다고 한다. 사숙에서의 수학기간은 약 10년(1897~1907)으로, 현재로 따지면 유아기(6세)에서부터 중학생(16세)까지로 볼 수 있다.​ 김기만은 1907년부터 1909년까지 학업을 위해 경성에서 거주한다. 경성에 있는 협성학교에서 교육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기만의 이력서에 따르면, 학업성취도는 보통 수준이라고 하였다.​ 협성학교에서 수학한 김기만은 고향으로 돌아가 수렵활동으로 생활을 이어나갔다. 이력서에 따르면, 김기만의 특기는 수렵이라고 한다. 총포를 잘 다루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찍이 독립운동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한 김기만은 3.1운동이 시작되기 전인 1918년부터 독립운동에 종사한다. ​ 김기만은 1919년부터 1921년까지 상해로 건너가 안창호 등 독립지사와 함께 임시정부 활동을 하였다. 김기만의 종교는 예수교 장로회였기 때문에, 안창호 등 기독교 인사들과 더욱 어울릴 수 있었다. 이 인연은 훗날 흥사단과 수양동우회 활동까지 이어진다. 김기만은 상해에 있을 때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하였다.​ 흥사단 단우번호 142번이다. 서약일은 1921년. 중국 원동위원부에서 흥사단에 가입했다. 1919년 7월 경(7월 26일 기록)에 평안남도 지역에 연통제 특파원으로 파견된 기록이 남아 있다. 1922년 2월 16일 《동아일보》 기사에 상해 임시정부 독립단 단원으로 국내 잠입 숨겨준 사실이 발각된 용강군 사건에 김기만 단원도 국내에 잠입한 그의 이름도 보인다. 일본이 수사한 “안창호의 동정에 관한 건(제1188호, 1938. 3. 31.)”에 따르면, 일본은 김기만이 안창호에게 금전을 제공하였다는 의심을 하였다. 실제로 김기만은 독립자금을 꾸준히 확보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동우회 공함 제3회(1931.9.1.)” 자료에 따르면 김기만은 15원을 보냈다고 하는 기록이 있으며, 김기만의 활동이 “동우회 공함”에 자주 나타났다. 그러나 1931년 무렵 김기만은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된 것으로 확인된다.. 출처 : 정종배시인의 망우리공원 인물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