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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담 허연(許然) 선생. 그는 1896년 평안남도 순안군에서 출생했다. 1908년 러셀 박사가 의료선교사로 봉사하던 순안병원에 침식을 제공받는 급사로 들어가면서 재림교회와 인연을 맺었다. 그의 곁에서 조수로 일하며 영어와 병원 업무를 배우던 중 1926년 러셀 박사의 주선으로 20세의 늦은 나이에 순안의명학교에 입학해 학업을 병행했다. 1919년 3월 6일 의명학교 교사와 학생들이 주도한 순안 만세운동에서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며 시위에 적극 가담했다. 경찰의 체포를 피해 스승 김창세의 추천장을 들고 상해로 망명했으며, 그해 상해 삼육대학(중학부)에 입학했다. 이즈음, 일경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어릴 때 이름이던 용성 대신 허연으로 개명했다. 이름을 바꿔준 이는 파리강화회의에 한국대표로 참석해 대한민국임시정부 명의로 된 탄원서를 제출하고, 〈한국민족의 주장〉·〈한국의 독립과 평화〉등의 민족선언서를 작성, 배포한 항일독립운동가 김규식 박사다. 1922년 상해 삼육대를 졸업한 그는 귀국해 경성연희전문에 입학했다. 2년 뒤 미국으로 건너가 과수원, 호텔 식당 등에서 일하며 학비를 모아 김규식 박사의 추천으로 로노크대학에 편입했다. 1929년에는 펜실베이니아대학 석사과정에 입학했으며, 1932년 경제학 석사 학위를 취득한 후 뉴욕에서 흥사단에 가입했다. 그의 흥사단 입단을 권유한 것도 의명학교 동창인 한승인이었다. 1933년 귀국해 협성실업학교(현 광신고)에서 교사로 근무하다 이듬해 김귀애 여사와 결혼했다. 1937년 6월 10일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누하동 자택에서 긴급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으며 1년2개월 동안 복역한 후 출소했다. 일경은 조서에 “조선 독립을 궁극적 목적으로 결성한 미국의 흥사단, 조선의 수양동우회에 가입해 수차례 회합하고, 협성실업학교의 상업전수과를 동우회 지도아래 두는 등의 활동을 했다”고 적시했다. 수양동우회 사건은 1937년 6월부터 1938년 3월에 걸쳐 일제가 수양동우회에 관련된 181명의 지식인을 검거한 사건. 당시 재경성기독교청년면려회가 각 지부에 기독교인으로서 독립에 이바지하는 방법을 담은 문서를 발송한 게 일경에 발각되면서, 그 배후를 밝히려는 과정에서 동우회가 수사망에 들게 됐다. 이에 안창호를 비롯해 이광수, 김성업 등 동우회의 지역 지부 대부분의 회원이 검거됐고, 재판 끝에 적게는 2년, 많게는 5년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허연 선생은 해방 후에도 흥사단 국내 위원부의 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민족계몽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949년 일제 때 옥고의 후유증(폐렴)으로 병석에 누웠으며, 그해 8월 12일 향년 53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도산 선생의 발치에 묻어 달라”는 유언에 따라 가족들은 망우리에 묘지를 마련했다. 출처 : 삼육대학교 상담심리학과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