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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음 11월 12일 평남 강서군 下에서 내부주사 김극서씨 2녀로 탄생하시다. 어려서부터 영특하야 한국여성의 무지미개함을 통탄하고 속히 교육받아서 부녀계몽을 하겠다고 결심하고 12세에 상경하여 이화학당에 입학하시다. 성적이 우수하야 여러 번 월반하고 늘 반의 수위를 차지하셨다. 재학 시 방학 때마다 농촌계몽운동과 전도 강연에 바빳고 3.1운동 때 유관순과 같이 민족운동의 선봉이 되었다. 학교당국에서는 그 재질을 상하야 이화대학을 졸업하자 장학생으로 도미 유학시켜 가사과를 전공케 하였고 귀국 후는 모교에서 교편을 잡고 가사과 창설에 공을 남겼다. 미국에서 김해 후인 김양천씨를 알게 되어 1930년 귀국하야 결혼하고 3남 2녀를 두어 단락한 가정 분위기 속에서 자녀교육에 전심전력하시와 오남매 전원 도미유학을 시켰고 밖으로는 산업발전에 힘써 국가경제의 재건을 꾀하고 안으로는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하야 치산에 능하셨다. 조국 해방 후는 국가 사회에 몸을 바쳐 경제면과 부녀운동에 헌신 노력하여 많은 공을 남겼으니 동기간이나 친지간에 우애가 깊어서 남을 돕고 협력하는 정신이 풍부하였다. 말년에 부군을 따라 도미하여 재미 중인 자손들을 고루 만나본 후 고국에 유류공급의 원활을 도모하여 조국경제를 돕고자 모국방문 여행 중 불의의 병으로 신음하시다 약석이 효를 얻지 못하고 1966년 4월 13일 독실한 신앙을 갖고 영면 승천하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