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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弼堡(필보)요, 자는 振聲(진성)이며 호는 素我(소아)요, 관은 광주니 경순왕후 고려 태조 시에 휘 녹광공이 광주군에 봉하여 仍貫(잉관)하니 그 후손인 휘 수해공은 고려말 부제학을 지내시다가 이태조의 개국에 際(제)하여 轉地(전지) 평남 덕천으로 낙향 세거하였다. 휘 천오속사영형률은 공의 고 증조 禰(예)로 삼한시대이며 공은 1892년 임진 7월 15일 평남 덕천에서 출생하시다. 1919년 기미에 재 하루빈 로 군사령관 호리왓트 대장과 연락 海蔘威(해삼위)를 중심으로 류동열 신영삼 등과 같이 한인 8백여 명을 모집 동청 철도수비대에 편입시켰고 또 상해임정과 연락을 취하다가 왜헌에 체포 경성으로 압송되었으나 류동열 양기택씨의 석방운동으로 3개월 여의 옥고 후 석방되어 계속 전남 광양 지방의 부호들에게 군자 7천원을 모금하여 양기택씨 등에 전달하고 其外(기외)에 1만 3천원의 모금 전달과 1천 여 매의 전단을 만들어 미국의원단 내한 시에 살포하였으며 또 전주 고산의 부호 친구인 고갑준씨 집에 야간 잠입하여 군자금 9천6백원을 강요하여 상해 은신 중 체포되어 징역 10년형을 받고 7년 복역 후 가출옥 석방한 뒤에도 소위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어 국내외의 항일투쟁사건이 발생할때마다 왜경에 구속되기 수차였다. 해방 후 임정요인이 환국하자 옛 동지 류동열씨가 통위부장으로 당선됨에 그를 보좌하여 국군 창설에 다대한 공을 세웠으며 6.25 사변 이후는 과거 고문 여독으로 행보조차 불능하여 항상 병석에서 신음하시다가 1968년 1월 1일에 향년 74세로 서거하였다. 정부에서 공의 공적을 치하하고 1968년 3월 1일에 건국공로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고 또 동 77년 11월 30일 재심에서 다시 건국훈장이 추서되었다. 공의 일생은 실로 건국을 위한 형극의 일로였다. 배 온양방씨는 1887년 11월 8일생에 1928년 1월 21일 졸하시고 배 김해김씨는 1896년 3월 27일생에 196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