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page


75page

앞선 탐방 시의 비문은 다음과 같다. 더 자세한 모습은 아래 앞선 탐방앨범을 같이 보시길..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보호조약"이 1905년 강행되자 이에 통분을 이기지 못하여 전국 방방곡곡에서 의병이 일어났으니 이곳 거창군의 북상면 월성리(당시 안의군) 남덕유산 일대도 예외가 아니었다. 여기에는 월성서당에서 40여명으로 결성된 월성의병에 관한 무용담을 빼놓을수 없다. 특히 월성의병의 활동에는 삼형제가 함께 참여하여 장렬한 순국을 했거나 마을을 구하고 동지들의 안전을 위해 기꺼지 자신의 삶을 희생한 고귀한 정신이 깃들어 있어 더욱 웃깃을 여미게 한다. 바로 박공삼형제에 관한 이야기 이다. 맏이 박화기(1871~1907, 자는 순경, 호는 유석) 아장은 천성이 강직총명하였고, 둘째 박수기(1873~1909, 자는 순일, 호는 포은)의병은 성품이 곧고 지덕을 겸비하였으며, 셋째 박민가(1875~1940, 이명 민기 또는 선기, 자는 순칠, 호는 송강) 의병 역시 대의를 중히 여기며 서예에도 능필이었는데, 이들은 밀성인이다. 삼공은 모두 5남 2녀로 은산부원군 문헌공의 후예요, 삼오정공의 12세손이다. 증조부는 박지형이요 조부는 박윤환이며 부는 박이익이다. 의병 삼형제는 동지들과 함께 각지에 연락처를 정보를 수집하고 대원을 훈련시켰으며, 군량과 무기를 조달하고 수시로 왜적을 기습공격하여 교란시켰다. 1906년에는 호서의병과 제휴하여 각처에 모여든 200여명의 덕유산의병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는데 협력하였으며, 전북 장수, 무주, 고창등의 전투에서는 적 수십명을 사살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1908년 무주 구천동 삿갓골 전투에서는 호서의병및 덕유산의병과 연합작전을 펴 혁혁한 전과를 거둔 바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하거명, 김권원의병이 전사하는등 피해도 컸다. 특히 1909년ㅁ 11월 전북 장수군 계북전투에서는 유춘일의병이 전사하고 박화기 아장은 총상을 입는 안타까운 일이 발생했다. 그런 와중에도 다행히 박화기 아장은 함께 참여한 동생 박수기의 부축을 받고 집에 돌아와 치료받을 수 있었다. 바로 그 무렵 일제의 정탐군 최고미가 이를 밀고하여 박화기, 박수기 두 형제는 전북 무주수비대에 피체되었고, 폭도 혐의로 그해 11월 16일 전북 장수군 계북면 양악에서 일제의 총격에 의해 순국하였다. 최고미의 밀고행위는 계속되어 1909년 12월 7일에는 하일청의병이 적에 의해 체포되어 살해되었다. 3년 후인 1912년 4월 26일 적은 다시 정탐꾼 최고미를 월성에 잠입시켜 의병의 행적을 내사케 했다. 이에 동민은 불안에 떨게 되었고 치미는 분노 또한 억제할 길이 없었다. 결국 동민은 정탐꾼을 찾아내어 만산별관에서 민족의 이름으로 처단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곧 적은 월성에 대거 출동하여 전 동민을 모아놓고 혹독한 신문을 가하기 시작했다. 동민은 노소를 막론하고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했다. "동민이 집단타살했다. 그 이유는 그가 무고한 사람들을 모함하여 피살케 하였으니 용서할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은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분위기는 점차 험악해지기 시작했고, 마을의 안정과 남은 의병들의 생명이 촌각에 다쿠는 상황이 되었다.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한 박민기의병은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내가 사감으로 한 단독소행이다. 내가 드를 죽인 뒤에 군중이 모여든 것이다. 동민은 나를 구출하기 위한 동정심에서 거짓말을 했다"라고 크게 외쳤다. 동민은 물론 적까지도 아연실색하였다. 그리하여 의병의 행위는 은폐되었고 동민은 무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박민기 의병은 1912년 9월 28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십년형의 선고를 받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그 후 그는 모진 고문의 후유증에 시달리다가 1940년 1월 16일 꿈에도 그리던 조국의 광복을 끝내 보지 못한채 영원히 잠들었다. 대한민국정부는 박공삼형제에게 2002년 8월 15일 각각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화기, 박수기, 두의사가 순국한지 94년 박민기 의사가 출옥한후 영면한지 64년이 되는 광복 59주년의 해를 맞아 문중의 충심어린 협조와 관계당국의 후원으로 추모사업추진위원회가 결성되어 유서깊은 이곳에 사적비를 세우게 되었다.
75page

경남 거창군 위천면 3.1독립운동기념비,북상면 6.25참전기념비,월성리 월성의거사적비,의사박공3형제항일사적비,양항리 윤철수선생 생가,교우 윤주하선생 문집책판,윤충하선생묘,문초처사 어명철선생유적비,유희탁의사유적비,침류정 파리장서비,이주환의사사적비,이주환의사동상,성암사,송병선선생문집책판,순국선열 이주환의묘,장기리 기미독립만세기념탑,충의사,임실마을 연호선생동상,성암사 연재선생문집책판,이주환선생묘,당산리 정대필,정영필선생묘,마리면 김동호선생묘,신원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