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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형제는 오일선 의진에 참여하여 의병으로 활약하였다. 일제가 1905년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자 전국 각지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박수기는 국권상실의 위기를 절감하고 무장투쟁을 통해 국권을 회복하고자 1905년 안의군 북상면(현,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에서 거의한 오일선 의진에 형 박화기, 동생 박민기 등과 함께 참여하여 항일 의병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는 아장인 형 박화기 휘하에서 유춘일 등과 함께 산 속에 막사를 짓고 본부와 연락을 취하며 각지를 습격하는 게릴라 전법을 통해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1906년 이후에는 문태서 의병과 제휴하여 전투를 치렀고 각지에서 모인 덕유산 의병 200여 명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1907년 거창전투, 1908년 구천동 전투, 1908년 9월 삿갓골 전투 등을 치르면서 항일 의병투쟁을 계속하였다. 1909년 10월 밀정 최고미(일명 최곰)의 밀고로 형 박화기와 함께 무주수비대에 의해 피체되어 순국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1908년 10월 장수 계북에서 적과 교전 중 형 박화기·유춘일 등과 함께 전사하였다고도 한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2002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박민기선생은 1912년 4월 26일 안의군 북상면 양지리에서 최고미를 처단하였다. 이러한 활동으로 그는 피체되어 1912년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0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