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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산 三山 김병수(金炳洙, 1898~1951, 독립운동가.정치가.의사) - 출처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한국학중앙연구회 전북 김제시 백구면 출생. 일제강점기 군산 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고, 서울의 남대문 정거장 앞에서 수백 명의 학생들을 이끌고 시위를 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습니다.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 재학 중이던 1919년 2월 25일 이갑성으로부터 200여 맹의 독립선언서를 전달 받고 이튿날 군산에 도착하였고 이후 영명학교 교사 박연세의 집에서 서울의 만세운동 계획을 전하고, 100여 맹의 독립선언서를 전해 준 뒤 지역민들에게 나누어 주도록 함으로써 3월 5일 군산 지역에서 만세 운동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만세 운동을 전개하다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 3개월을 복역하였고 출옥 후 1921년 군산 야소교병원을 거쳐 다음해에 익산에 삼산의원을 개원하였습니다. 사재를 털어 광희여숙을 설립하는 등 여성교육에도 공헌하였으며, 28세때는 익산제일교회 장로가 되어 교회에 유치원을 설치하고 익산청년회관도 건립하였습니다. 1945년 8.15해방 후 김병수는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 중 같은 해 9월 건국준비위원회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자 이에 항쟁하기 위하여 그 해 12월 이리.익산 독립촉성회를 조직하고 위원장에 선출되었습니다. 그 외 1946년 2월 대한독립촉성회 전북지부 부위원장 9월 세브란스 재단법인 이사에 선출되었고 1947년 3월 대한농민총연맹 전북위원장 4월 초대 이리부윤에 취임과 더불어 대한농민총연맹전국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습니다. 같은 해 12월에는 민주국민당 이리시당 부위원장, 1949년에는 민주국민당 전북당지부 최고위원이 되었고 한국전쟁 때는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동래 제5육군병원에서 군의관으로 활약하다 유엔군의 진격과 함께 고향에 돌아와 구국총력연맹 위원장으로 활약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