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左右(좌우)를 넘어 민족의 이름 아래 일제에 함께 맞선 신간회 - 배헌, 신채호, 임영택, 임혁근 신간회는 1927년 2월 '민족 유일당 민족협동전선'이라는 표어 아래 민족주의를 표방하고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제휴하여 창립한 민족운동단체이다. 안재홍.이상재.백관수.신채호.신석우 등 34명이 발기했다. 1930년에는 전국에 140여 개의 지회와 3만 9,0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으며, 일본까지 조직된 각 지회를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했다. 일본의 《고등경찰요사(高等警察要史)》는 '배일선인(排日鮮人) 가운데 저명한 인물은 거의 여기에 가입하였고... 이들이 집회 등에서 하는 언동으로 보아 이 운동의 도달점은 조선의 독립에 있음을 알 수 있다.'라고 당시 신간회의 성격을 규정하고 있다. 신간회의 세력이 이렇게 성장하고 일제의 탄압이 거세져서 대규모 집회를 열 수 없었다.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일제에 대해 학생운동의 탄압을 엄중 항의했다. 또한 이를 계기로 독립운동을 지향한 민중대회를 열 것을 계획했다가, 조병옥.이관용.이원혁 등 주요 인사 44명이 체포되었다. 체포된 인사 가운데 조병옥 등 6명은 실형을 받았으며, 이로 인해 신간회의 뿌리가 흔들리게 되었다. 표면적으로 좌우익 세력이 합작하여 만든 단체였지만, 민족주의 진영에게 주도권을 빼앗긴 것에 대해 사회주의 진영의 불만이 높았다. 이들은 신간회의 주요 간부들이 투옥된 사이, 해산운동을 벌였으며 1931년 5월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에서 대의원 77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소를 결의함으로써 발족한 지 4년 만에 해산되었다. ▷ 익산 지역 신간회 운동 : 1927년 3월 29일 이리에서 개최된 전북사회운동자대회에서는 '신간회에 관한 건'이 안건으로 상정되었고 그해 4월 17일 이리청년회관에서 백남순의 사회로 신간회 익산지회 창립이 논의되었다. 설립 준비위원 6인은 배헌, 임혁근, 백남순, 양재섭, 양관해, 정한조 등이었다. 회원 36명을 모집하여 1927년 6월 29일 설립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으나 하루 전날 일제는 배포된 선전문을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는 소위 정체를 변혁하고,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취지의 문서'라고 판단하고 관련 인사들을 모두 기소하여 익산지회 창립은 무산되고 말았다. 1928년 4월 다시 한번 신간회 창립대회를 개최하려 했지만 경찰의 간섭으로 무산되었다. 일제가 익산의 신간회 지회 설립을 공권력으로 저지한 것은 그만큼 익산의 사회운동이 강렬했음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