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page


158page

◇ 이리 농림 항일 투쟁 - 익산 지역 학생운동의 상징성은 이리농림학교에서 찾을 수 있다. 이리농림학교는 1922년 개교하여 농과와 임과에 각 50명씩 모집하는 입학시험에 전국에서 지원자가 몰렸다.'내선일체'를 내세운 조선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조선인과 일본인 입학생이 반반이었으나 식민지 거주 인구 비율을 감안하면 일학부터 민족차별이 교묘하게 이뤄졌던 셈이다. 조선인 입학생은 성적 상위 10% 안에 드는 수재들이었고, 일본인은 상위 30% 이내 수준이었다. 이리농림학교에서의 학생운동은 1929년 광주학생운동 이후 더욱 격렬하게 전개되었는데 기숙사 생활을 하는 학생들 간의 고전독서회를 조직하여 회장 박승구(농과 5년)를 중심으로 소책자를 인쇄하여 학생들에게 배포하고 소규모 모임을 확대해 나갔다. 그러다가 1930년 2월 '사상불온학생'이라는 빨간딱지를 학적부에 남기고 박승구, 진기열, 진집종이 퇴학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한 가운데 1930년 11월 학생들의 분노가 폭발하게 되었다. 이날은 이리농림학교 '추계체육대회'를 보기 위해 각지에서 방문한 학부모들에게 일본교사는 조선인은 내빈용 텐트에서 나가라며 호령을 하였고 이러한 차별을 목격한 독서회 학생들은 격문을 뿌리고 학교 당국에 진정하기로 결의했다. 일본경찰은 진정서를 제출한 학생들을 검거하고 고문하여 신정근, 유현, 임경래 등이 사망하였고 주동 학생들 이름을 학적부에서 말살시켜버렸다. 1930년대 이리농림학교 학생들의 사진을 보면 복장이 일본군 병사처럼 보이는데 이는 일제가 1935년 모든 중등학교에 일본군 현역 장교를 배치하여 군사 훈련을 진행했고 이후 1939년에는 학생들을 강제 징집하여 전쟁에 참전시켰다. 근대 영농을 배우고 수의사가 되고자 이리농림학교에 입학한 전국의 조선인 수재들은 교련과 학병에 동원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