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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는 힘을 이긴다 외쳤던 의병장, 오하 이규홍 - 이규홍(李奎泓)은 1881년 전북 익산군 두천면 관동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탁월하여 18세에 문장과 명망이 알려지게 되고 20세에 중추원 의관직에 올랐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에 격분하여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에 뜻있는 동지 박이환(朴駬桓) 문형모(文亨模)와 호남 의병장 최익현과 임병찬을 만나 창의(唱義)를 다짐하고 맹약했다. 아들의 의지를 접한 부친 이기영(李琪榮)은 '국가의 위기를 맞아 보국의 도리를 다하게 된 내아들이 자랑스럽다. 가산의 전부라도 바칠테니 오로지 국가에 헌신하라'며 아들을 후원했다. 관군에 체포되어 쓰시마섬에서 유배 중이던 최익현이 순국하자 이규홍은 최익현의 유지를 받들고자 해산된 병사 100여 명과 뜻있는 100여 인을 모아 11월 6일 거병하였다. 의병 출범식에서 이규홍은 '왜군은 힘으로 싸우지만 우리는 의로써 싸운다. 의는 힘을 이긴다'고 외쳤다. 병기제작소까지 만들어 전투에 임했으며 왜군 129명을 사살하는 공적을 세웠으나 당시 익산 군수 김정기의 고발로 일본군에 의해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그럼에도 이규홍은 진안, 장수, 용담 등지의 산간으로 옮겨 다니며 계속해서 왜군과 싸웠지만 지속된 전투로 아군의 전사자 수는 늘어가고 일본군과 합세한 관군 토벌대가 의병의 가족들까지 위협하는 상황에 봉착하여 자수하는 아군의 숫자도 늘어갔다. 1908년 4월 20일 남은 의병들과 대전 식장산 장군 바위 아래서 비참한 심정으로 눈물을 머금고 의병해산을 선언한다. 당시 심정을 그의 오하일기에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칼을 던지고 빈산에 앉아 잇으니 흐르는 눈물이 전의(傳衣)를 적신다, 저 두견새도 나의 마음을 알아서 불여귀의 슬픈 마음을 함께 울어주네" 해산 이후 이규홍은 그의 동지 박이환, 문형모와 함께 꾸준히 항일운동을 전개했으나 국내에서 일제에 대항하기 쉽지 않음을 느끼고 중국으로 떠났다. 상하이에서 이동녕, 이광수, 안창호, 신익희 등과 접촉하였고 김규식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고 1920년에는 김좌진을 만나 군자금 3,000원을 지원하였다. 그해 6월 이규홍은 국내로 들어와 4년간 활동하다가 1924년 2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4개월간의 모진 고문 후에 출감하였지만 고문후유증으로 1928년 6월 6일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