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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익산지역의 의병투쟁 - 전북지역은 반봉건과 반외세 내건 동학농민혁명의 핵심지역이였다. 특히 익산 출신의 동학교도 오지영(吳知泳)은 익산 지역에서 동학농민혁명(東學農民革命)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기도 한 인물이다. 그러나 동학농민혁명은 관군과 일본군의 강경 진압으로 실패하게 되었고, 1907년 정미의병(丁未義兵) 이전까지 전북지역 의병 활동이 소극적으로 변하는 데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일제는 러일전쟁(露日戰爭) 이후 불법적으로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여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하여 본격적인 식민지 지배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을사늑약으로 상실된 국권회복을 목표로 거병한 을사의병(乙巳義兵)과 병오의병(丙午義兵)은 이전보다 훨씬 더 치열한 양상으로 전개되었고 전북지역의 병오의병은 1906년 면암 최익현(崔益鉉)과 임병찬(林炳瓚)을 중심으로 일어났는데 최익현의 의병은 군사적 활동이 두드러지진 않지만 유림의 태두인 최익현이 74세의 노구를 이끌고 항일투쟁 최전선에 나섰던 모습 자체가 촉매제가 되어 전북지역 의병 호라동에 큰 자극이 되었다. ◇ 의병장 유장렬 - 전라북도 고창 출신으로 이석용(李錫庸) 휘하의 부장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1912년 항일비밀결사인 독립의군부에 가입하였다. 이후 조선총독 데라우치에게 국권반환요구서 및 일본군 철병 요구서를 제출하였고, 1914년 한훈(韓焄) 등과 같이 경상북도 풍기에서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였으며 1915년 대구의 국권회복단(國權恢復團)과 협력하여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로 개칭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전라도 일대에서 경찰과 친일파 처단 및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였다. 1919년 전주의 부호를 찾아가 군자금을 획득하려다가 경찰의 급습을 받고 교전 끝에 붙잡혀 징역 12년형을 언도 받았으나, 수감생활 중 추가 독립운동 활동이 탄로되어 1922년 징역 5년형이 추가 구형되었다. 고문 후유증으로 반신불수의 몸으로 15년 만에 출옥하여 거처를 익산으로 옮겨 의열투쟁을 전개하였으며, 향년 83세로 생을 마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