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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적서 공의 후는 영상, 호는 보익(輔益)이라. 시조는 백제십제공신인 섭의 47세손이요, 부 대현의 장자로 고종 을유 서기 1885년 9월 2일 진안군 마령면 오동리에서 출생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성품이 온화단정하며 한문학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부모님에께는 효성이 지극하여 조석으로 문안드리며 집을 날때에는 반드시 고하고 들면 상면을 하였다. 부모님께서 병석에 계실때에는 아무리 밤중이라도 또는 먼곳이라도 백약을 구하여 봉양하기에 전력을 다하였다. 집안간에는 우애와 화목을 신조로 하여 인근 사람들로부터 칭송이 자자하였다. 밖으로는 항상 나라가 어지러움을 걱정하면서 한탄도 많이 하셨다. 국치 이후 조국광복 일념으로 일관해 오다가 기미년 1919년 3월 1일 드디어 독립선언문이 제창되자 시기가 온 것을 단정하고 평소에 애국일념으로 굳게 결속된 동지 동면 평지리 오기열, 석교리 김귀영, 성수면 도통리 전경운 등과 협의 석교리에 거주하는 이성녀 전기 김귀영의 소실 집에서 동년 2월 29일 야간에 회합 결의 끝에 주민들의 봉기를 호소하는 격문을 작성하고 태극기를 수백매를 제작하여 다음날 3월 1일 평지리 계사리 강정리 기타 각부락에서 몰려오는 군중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주고 독립만세를 웨치면서 행진하다가 환도를 들고 달려드는 왜경을 붇들어 곤봉으로 위협하면서 강제로 만세를 부르게 호령하면서 군중들과 합세 계속 행진하다가 몰려오는 왜헌병대에 체포되어 주재소에 구금 중 벽을 박차고 탈출하여 산으로 도주하다가 달려오는 헌병 및 왜경을 향하여 돌을 굴리며 적의 추격을 분쇄하는 등 용감히 활약하시다가 결국은 체포되어 동년 4월 24일 광주지방법원 전주지청에서 1년 6월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다. 그 후 농사에 종사하다가 왜정말기에 만주에 가서 은거하시다가 1945년 광복과 더불어 고향으로 돌아와 자유독립을 웨치면서 우리 강토에 광명이 오게됨을 기쁘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6.25 동란이 발발되자 덕천리 안곡에 은거하시다가 일생에 밝은 빛을 보지 못하기고 성수면 점촌 아들 응주 자택에서 일생을 마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