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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익상(金益相)은 경기도 고양(高陽) 사람이다.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를 졸업하고 후에 기독교계 학교의 교사를 지냈던 그는 서울에 올라와서 광성연초공사(廣城煙草公司)의 기계감독으로 있으면서 항시 비행사가 되기를 희망하던 중 봉천(奉天)에 광성연초공사 지점이 설치되자 1920년 6월 봉천으로 전근되었다. 그리하여 봉천에서 공사(公司) 감시원 송동휘(宋東輝)와 공모하고 비행학교가 있는 광동학교로 갔으나 당시 중국은 내란 중이었던 관계로 비행학교가 폐교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그후 그는 이정룡(李正龍 이명 吳成崙)과 같이 서양인 구이르드가 경영하는 전차회사의 전차감독이 되면서 북경(北京)으로 가서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을 만나는 한편 동단에 입단하였다. 그리고 곧 조선총독 재등실(齋藤實)을 처단하기로 계획하고 폭탄 2개와 권총 두자루를 받아 1921년 9월 10일 북경을 떠나 동월 11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다음날인 12일에 그는 전기수리공으로 가장하고 총독부에 들어가서 폭탄 2개를 투척하였으나 1개는 불발하고 한 개만 폭발하였다. 거사 직후 피신하여 일인 요리점으로 갔다가 다시 철공으로 변장하여 기차를 타고 평양에 도착, 그곳에서 수일간 체류하다가 북경으로 돌아갔다. 그는 총독부 투탄 거사가 성과를 보지 못하자 재거할 것을 결심하고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과 상의한 다음 1922년 2월 상해로 가서 동지 오성륜(吳成崙 원명 李正龍)과 함께 동월 28일 오후 3시 반경 상해 세관(稅關) 부두에서 필리핀(比律賓)으로부터 상해에 도착하는 일본 전 육군대신 전중의일(田中義一) 육군대장을 향하여 오성륜이 먼저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명중되지 않자 그는 폭탄을 던지고 이어 육혈포를 연사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폭탄은 불발되고 탄환도 전중(田中)에게 맞지 않았다. 그후 중국 항무국(港務局)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고 일본영사관에 인도되었다가 일본 장기지방재판소(長岐地方裁判所)로 압송케 되었다. 이때 동지 오성륜은 파옥·탈주하였고 그는 1922년 5월 5일 장기 형무소로 압송되었다. 1922년 5월 19일 개정된 장기지방재판소에서 재판장은 그에게 "네가 중국순경에게 총을 쏜 것은 그를 죽일 목적으로 쏜 것이 아니냐"하고 묻자 냉소하며 "우리가 아무 관계없는 중국인을 죽일 필요는 없고 오직 위협하기 위하여 쏜 것이요, 만약 전중(田中)에게 쏘았다면 그야 물론 죽이려고 쏜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때 장기(長岐)의 각 신문들은 그의 담대한 행동을 대서 특필하여 도처에 큰 화제거리가 되었다 한다. 지방재판소에서는 무기형이 선고되었으나 장기공소원(長岐控訴院)에서 재판장 이삼(伊森)이 사형을 선고하자 의자를 들어 이삼(伊森)을 치고 큰 소리로 "일본은 반드시 망할 것이요, 조국 대한은 꼭 독립이 된다"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한 후에 수감되었다. 장기형무소(長岐刑務所) 편연지소(片淵支所)에 수감중 1924년 1월 무기형으로 감형되고, 다시 20년 징역으로 감형되어 21년의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어 귀향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총장 조소앙(趙素昻)은 일제의 외무대신 내전강재(內田康哉)에게 항의문을 발송하여 그의 사형이 부당함과 또 열사를 사형에 처하더라도 이 이후에 무수한 김익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엄중하게 경고하였다. 한편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서에서 파옥·탈주한 오성륜(吳成崙)은 프랑스·러시아·중국 각지를 다니며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광동정부(廣東政府) 중앙군사정치학교(中央軍事政治學校)의 교관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독립김익상(金益相)은 경기도 고양(高陽) 사람이다. 평양 숭실학교(崇實學校)를 졸업하고 후에 기독교계 학교의 교사를 지냈던 그는 서울에 올라와서 광성연초공사(廣城煙草公司)의 기계감독으로 있으면서 항시 비행사가 되기를 희망하던 중 봉천(奉天)에 광성연초공사 지점이 설치되자 1920년 6월 봉천으로 전근되었다. 그리하여 봉천에서 공사(公司) 감시원 송동휘(宋東輝)와 공모하고 비행학교가 있는 광동학교로 갔으나 당시 중국은 내란 중이었던 관계로 비행학교가 폐교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상해로 돌아왔다. 그후 그는 이정룡(李正龍 이명 吳成崙)과 같이 서양인 구이르드가 경영하는 전차회사의 전차감독이 되면서 북경(北京)으로 가서 의열단장(義烈團長) 김원봉(金元鳳)을 만나는 한편 동단에 입단하였다. 그리고 곧 조선총독 재등실(齋藤實)을 처단하기로 계획하고 폭탄 2개와 권총 두자루를 받아 1921년 9월 10일 북경을 떠나 동월 11일에 서울에 도착하였다. 다음날인 12일에 그는 전기수리공으로 가장하고 총독부에 들어가서 폭탄 2개를 투척하였으나 1개는 불발하고 한 개만 폭발하였다. 거사 직후 피신하여 일인 요리점으로 갔다가 다시 철공으로 변장하여 기차를 타고 평양에 도착, 그곳에서 수일간 체류하다가 북경으로 돌아갔다. 그는 총독부 투탄 거사가 성과를 보지 못하자 재거할 것을 결심하고 의열단장 김원봉(金元鳳)과 상의한 다음 1922년 2월 상해로 가서 동지 오성륜(吳成崙 원명 李正龍)과 함께 동월 28일 오후 3시 반경 상해 세관(稅關) 부두에서 필리핀(比律賓)으로부터 상해에 도착하는 일본 전 육군대신 전중의일(田中義一) 육군대장을 향하여 오성륜이 먼저 권총을 발사하였으나 명중되지 않자 그는 폭탄을 던지고 이어 육혈포를 연사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폭탄은 불발되고 탄환도 전중(田中)에게 맞지 않았다. 그후 중국 항무국(港務局) 경찰서에서 취조를 받고 일본영사관에 인도되었다가 일본 장기지방재판소(長岐地方裁判所)로 압송케 되었다. 이때 동지 오성륜은 파옥·탈주하였고 그는 1922년 5월 5일 장기 형무소로 압송되었다. 1922년 5월 19일 개정된 장기지방재판소에서 재판장은 그에게 "네가 중국순경에게 총을 쏜 것은 그를 죽일 목적으로 쏜 것이 아니냐"하고 묻자 냉소하며 "우리가 아무 관계없는 중국인을 죽일 필요는 없고 오직 위협하기 위하여 쏜 것이요, 만약 전중(田中)에게 쏘았다면 그야 물론 죽이려고 쏜 것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때 장기(長岐)의 각 신문들은 그의 담대한 행동을 대서 특필하여 도처에 큰 화제거리가 되었다 한다. 지방재판소에서는 무기형이 선고되었으나 장기공소원(長岐控訴院)에서 재판장 이삼(伊森)이 사형을 선고하자 의자를 들어 이삼(伊森)을 치고 큰 소리로 "일본은 반드시 망할 것이요, 조국 대한은 꼭 독립이 된다"하고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한 후에 수감되었다. 장기형무소(長岐刑務所) 편연지소(片淵支所)에 수감중 1924년 1월 무기형으로 감형되고, 다시 20년 징역으로 감형되어 21년의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어 귀향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무총장 조소앙(趙素昻)은 일제의 외무대신 내전강재(內田康哉)에게 항의문을 발송하여 그의 사형이 부당함과 또 열사를 사형에 처하더라도 이 이후에 무수한 김익상이 나타날 것이라고 엄중하게 경고하였다. 한편 상해 일본영사관 경찰서에서 파옥·탈주한 오성륜(吳成崙)은 프랑스·러시아·중국 각지를 다니며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광동정부(廣東政府) 중앙군사정치학교(中央軍事政治學校)의 교관으로 있으면서 수많은 독립군 장교를 배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군 장교를 배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