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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천면 상일리 일대 3.1만세 운동의 경과 서울과 인접한 광주군(廣州郡) 일대에서는 1919년 3월 23일 이후 서울의 영향을 입어 밤에는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낮에는 시위행렬을 만들어 각 면사무소에 집결해 만세시위를 했다. 3월 27일에는 광주군 구천면, 동부면, 서부면의 농민 1,000여명이 상일리에 집결해 헌병주재소를 포위하고 맹렬한 만세 시위를 전개했다. 당시 광주군 구천면 상일리(현 강동구 상일동)는 경기도 이천, 여주를 거쳐 강원도 원주, 강릉으로 이어지는 경성강릉건의 길목이었기에 일제는 이곳에 헌병주재소를 설치해서 구천면, 동부면, 서부면 3개 면을 관할했다. 상일리는 이 3개 면이 접해 있는 중심지였기에 주민들이 모여 만세를 불렀다. 구천면의 만세운동은 3월 27일 면의 서남단인길리, 동부면 풍산리 등 5~6곳의 고지에서 시작되어 면의 동북단인 상일리로 발전되었다. 명일리와 암사리 등지를 거치면서 시위 군중 수는 500여 명으로 증가되었으며, 이후 구희서 등이 이끄는 1,000명 이상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헌병주재소까지 이르렀다. 이에 헌병은 무차별로 총을 쏘아, 서부면 감북리에 사는 안종현(56세)과 감이리에 사는 최천성(23세)이 총을 맞아 죽고 10명이 부상당했다. 당시 일제 측의 문서에도 구천면 상일리 3.1만세운동에 대해 자세하게 기록되어있다. 3월 27일 상일리에 인접한 광주군 동부면에서도 만세시위가 여러 차례 벌어졌다. 상일리에서 2km 떨어진 동부면 풍산리에서는 김홍렬 주도로 마을주민 약 20명이 산상횃불시위를 벌였고, 상일리에서 4km 떨어진 동부면사무소 앞에서도 이대헌, 김교영등의 주소로 약 500명의 인원이 만세운동을 진행하였다. 이들 지역은 하나의 생활권역으로 상일리 3.1만세운동과 밀접한 상호연관성을 지닌 운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