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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민족의 역사 있는 곳에 민족의 정기 끊임없이 흐르니 이 나라의 역사와 함께 정의의 발현은 연면부절하였다. 단기 4293년 3월 15일 제4대 대통령 및 제5대 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 정권은 그들 독재의 기반을 공고히 하기 위하여 부정과 불법이 극도에 이르렀다. 주권을 빼앗긴 국민은 입이 있으나 말을 못하는 판에 참다못한 우리 마산의 학생들은 누적된 분노를 이 고장에 폭발시켰으니 김용실군과 김영준군은 그때 민주의 선봉에 섰다가 독재의 총탄에 쓰러진 우리 학교의 두 젊은 꽃이었다. 김용실군은 4276년 12월 17일 창원 진동에서 김기우씨의 장남으로 태어나서 마산중학을 거쳐 1학년 B반의 급장으로 있던 모범 학생이었다. 무학 국민학교 앞에서 두부관통총상을 입고 도립병원 냉동방에 버려졌다가 18일 하오 9시, 열일곱의 젊은 피는 한 알의 밀로 땅에 떨어졌다. 그리고 김영준군은 4274년 12월 15일 신의주에서 김도하씨의 3남으로 태어나서 홀어머니의 손으로 마산중학을 거쳐 금년 봄에 우리 학교를 졸업하였다. 시청앞에서 총상을 입고 도립병원 냉동방에 버려졌다가 18일 하오 9시 열아홉의 끓는 피는 마침내 이 나라 민주발전에 거룩한 거름이 되었다. 이제 민주혁명이 이루어진 날 전체 학생과 동창회 사친회가 정성을 모아 군들을 추념하여 여기 새기노니 굽어보는 합포만은 의혈이 스며 산호가 붉다. 단기 4293년 7월 15일 학생 일동과 동창회 사친회 교직원 일동은 삼가 세우고 교사 이순섭 이훈경은 이 글을 짓고 쓰다. 그리고 서기 1992년 4월 19일 제19회 제21회 동창 일동이 재 건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