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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애국지사 이창휘(李昌輝) 변호사 한라 영산의 기운이 이 땅에 뻗어 걸출한 인물이 태어났으니 이창휘 선생이시다. 선생의 본관은 전주이며 부 이행욱 모 송봉온의 6남 1녀 중 차남으로 1897년 5월 27일 고산리 1695번지에서 태어나 청소년기에는 1618-2번지에서 사셨다. 서당 훈장 김창희 선생에게서 배우고 이어서 신성사숙(고산초등학교 전신)을 수료하자 우수한 성적을 인정받아 숙장이 면장에게 추천하여 장학생으로 천거, 제주공립농업학교에 입학, 제7회로 졸업하여 상경하였다. 상해임시정부에 들어가 독립운동을 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가 독립운동을 하다 잡혀 온 분들을 변호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판단으로 법률 공부를 시작하여 1921년 보통(문관)시험에 합격하고 보성전문학교(현 고려대) 법과를 졸업하여 1924년 10월 변호사시험에 합격함으로써 항일민족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항일변론에 앞장섰던 김병로.이인.허헌 등과 더불어 민족변호사 3인방 또는 4인방으로 일컬어졌으며 그들 중 이창휘 변호사가 가장 활발하였다. 선생은 주로 독립운동가 무료변론에 나서서 일제에 저항하였으니 6.10만세운동, 조선공산당사건, 공명단사건, 여운형선생사건, 광주학생운동, 도산안창호선생사건 등 17개 사건의 변론에서 '독립운동은 범죄가 아니다'라는 주장으로 일관하였으며, 그 중에는 제주도의 무정부주의사건, 신인회사건, 우리계사건, 김문준(일본전협)사건도 변론을 맡았다. 조선농민사이사, 제주출신유학생후원회장, 보성전문학교교우회장, 조선변호사협회장 등을 지냈고, 농민야학.공생조합운동.공동경작운동을 지원하였으며, 고산포구를 정기여객선 항로에 포함시키도록 하였고, 고산우체국 설립 과정에 힘을 쓰는 등 고향 발전에도 기여하였다. 법률 강연으로도 전국에 명성을 떨치던 선생은 9134년 가을 함경북도 웅기에 강연차 갔을 때 한 여관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으니 9월 9일이었다. 이는 일본 경찰에 의한 암살로 추정되지만 끝내 밝혀지지는 않았다. 선생의 독립운동 사실은 고산`리 노인회장이었던 고 고원준씨가 10여년 동안 자료를 발굴.수집하여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고, 정부는 1995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묘는 조수리 3838번지에 있다가 손자 이방헌씨가 2010년 10월 12일 대전 국립현충원(제14묘역 298호)으로 옮겼다. (가족관계 : 부인 김노매, 장남 윤식, 차남 광식, 따님 영자, 손자 방헌, 외손 양근호, 철호, 진호, 외손녀 선례, 경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