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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장성신문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되어있다. 출옥한 후 1921년부터 송사 기우만의 제자로서 전남학계의 대표로 활동하였고, 1927년 12월 신간회(新幹會) 장성지회가 창립되자 적극 가담하였고, 세금 불납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장안리 입구에 있는 영사정(永思亭 : 서당)에서 문맹퇴치를 위해 활동하였다. 1930년에는 광주학생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배후에서 학생들을 지도하기도 하였다. 또한 1931년 5월 신간회가 해체되는 날까지 후배 양성과 민족의식 고취를 위해 활동하였다 변진설은 출가하여 법명을 월주(月舟), 법호는 백용성 스님이 제자로 받아들이며 지어준 봉암(鳳庵)이다. 법호를 봉암으로 한 것은 그가 태어난 장안의 봉암서원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짐작된다. 출가하여 법명 월주가 된 그는 백양사에서 송만암스님에게 처음 참선 공부를 시작하여 화엄사에서 당대의 불교학의 대가였던 진진응 스님에게 불교경전을 수학하였다. 1939년 독립선언문 33인 가운데 불교계 대표였던 백용성스님의 문하에 들어가 그로부터 법을 전하는 전법게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