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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종헌이요 호는 양송이니 남양인이라. 시조는 고려태사 휘 殷悅(은열)이요 6세 휘는 충평공이요 11세 휘 子潘(자반)은 벽상삼한(壁上三韓)이요 16세 휘 深(심)은 한성부윤 순충보조공신 영의정 익 성부원군 휘 宗烈 復休 明學 在宣은 공의 高曾祖考이며 妣는 순흥안씨이다. 공이 1867년 11월 23일생 천성이 강의하고 또 시서에 능통하였다. 국운이 否寒(비색)하여 왜적과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통분을 참지못하고 구국의 일념으로 동학에 입도한후 양주접주로 선임되어 상해 임시정부와 내통하여 자기 전답을 매각하여 군자금으로 헌납하고 또 화약을 제조하고 화승및 군복을 제조하며 기타 군장비에 필요한 물자를 차질없이 장기간 지원하던 중 기미(1919)년 고종황제가 승하하자 배일감정이 노골적으로 폭발되어 삼천리 방방곡곡에서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노도같이 터져나왔다. 이때 공은 동지인 홍종각 홍종문 한도원 홍종완 홍순주 홍종운 윤덕현 홍종건 홍병준 등 제씨들과 규합하여 밤마다 몰래 태극기를 만들어 약속한 3월 20일 동두천 장날에 나오는 사람마다 태극기를 들려주고 대한독립만세를 부르도록 공이 진두지휘하니 소식을 접한 왜적기마대가 공포를 쏘며 상하장으로 드리닥쳐 광분하는 것을 공이 마상에 앉은 왜적 소좌 佐藤豊次郞의 발목을 낙꿔채서 타살하니 만세를 부르는 군중의 함성은 천지를 흔들었다. 이때 노도같은 군중을 진압하던 왜적이 무차별 총질을 가하는 사이 1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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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군중은 산산이 흐터지고 공 피신중 왜적 헌병이 혈안이 되어 주모 선동자를 색출할새 공이 지목되어 사방으로 찾던중 송라산에서 체포되어 장렬이 순절하였으니 53세였다. 슬프다 공의 우국순절의 애정과 위무불굴의 대의는 저 일월과 같이 천추에 빛났으며 雪嶺(설령)의 孤松(고송)이요 頹沈支柱(퇴침지주)가 아닐 수 없다. 그 위대한 공적은 어찌 이 작은 비에 다 기재할수 있으리오. 기리기리 청사에 빛나리라. 子는 淳德이요 孫은 性一이며 曾玄이하는 서록하지 못한다. 서기 1959 기해년 4월일 립 천도교도정 김광욱 천도교양주교구장 이응관 천도교동두천교구장 강속항 근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