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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복자 김안당의 본 이름은 우집이고 자는 치윤이며 실제는 성우라고 불렸다. 그는 졍주김씨 계림군파 16대손으로 1794년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망월리 주산에서 태어나 성품이 정직하고 온화하여 만인의 모범이었다. 1830년경 두 형제와 함께 천주교를 믿고 친척과 이웃을 입교시켜 온 마을을 열심한 교우촌으로 만들어 오늘에 이르게 하였다. 모친 별세후 더 자주 성사를 받고자 서울로 이사하여 누리골과 마장안에서 살았다. 자기 집을 공소로 하여 1833년에 입국한 중국인 유방제 신부를 모시고 회장직분을 다하였으며 1836년에 입국한 프랑스인 모방 라신부도 한해 여름이나 집에 모시고 우리 말 공부와 포교활동을 하게 하였다. 1840년 1월에 천주교인이란 죄목으로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남한산성 감옥과 포도청을 거쳐 형조로 압송되었고 많은 심문과 모진 형벌속에서도 천주교인를 증거하며 나는 천주교인이오 살아서도 천주교인으로 살고 죽어도 천주교인으로 죽고자 할 따음이오 하고 대답하여 감옥을 자기 집으로 여기고 다른 죄수들에게 교리를 가르쳐 두 사람에게는 성세까지 주었다. 1841년 4얼 28일 곤장 60대를 맞고도 용맹히 신앙을 증언한 후 다음날 즉 29일 밤에 교살형을 당함으써 순교의 영광을 얻으니 나이는 47세였다. 친척과 이웃에서 평소 그의 덕을 생각하며 시체를 거두어 고향 땅 구산 바로 이곳에 성대한 장례로 안장하였다. 이에 로마교황 비오11세꼐서는 1925년 7월 5일에그를 복자위에 올리셨고 한국교회는 그를 더욱 공경하고자 1927년 5월 30일 유해를 종현성당으로 모시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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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안당의 바로 아래 동생 김아오스딩은 본 이름이 만집이고 자는 치영이나 흔히 덕심이라 불렀고 막내 문집의 본명은 미상이나 자는 윤심이다. 이들도 같은 죄목으로 체포되어 한결같이 굳세게 신앙을 증거하였다. 안당 네 형제들이 남한산성 감옥에 있는 동안 남은 가족들이 구산에서 30여리 길로 매일 음식을 날라다 주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발걸음마다 심히 울어 빈 밥그릇에는 눈물이 고였다고 김안당의 3대손 김교익 도마는 밝히증언하였다 김덕심 아오스딩은 1841년 1월 28일 옥중생 20여개월 만에 극심한 형별과 질병으로 신앙을 증언하면서 옥사하였고 막내는 왕세자 탄일의 특별사면에서도 제외되어 여러 해를 옥살이로 보내었고 굳게 신앙을 증거하면서 거룩히 순교하였다. 이제 우리는 거룩하고 위대한 우리 순교자들의 흘린 피와 얼을 이어받고 기리 빛내며 널리 후대에까지 전하고자 작은 정성을 모아 한 조각 돌에 새겨 피로 물든 이 땅에 세우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