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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11 Ⅰ . 3 · 1 운 동 과 경 남 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Ⅰ . 3 · 1 운 동 과 경 남 김해 진영 장날 의거의 주동자 김우현은 하계면 서기였다 4.5 김해 진영 만세시위 <칼로 진압. 부상자 2명 발생> (매일신보, 1919. 4. 10.)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4.5 김해 진영 만세시위 주모자 체포 <6천여명이 만세참여. 주모자 4명 체포> (매일신보, 1919. 4. 11.)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3월 25일은 삼천포 장날이면서, 삼천포공립보통학교 제2회 졸업식 날이었다. 이날 사천에서는 3개의 대로 나누어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제1대는 학생을 중심으로 노산공원에서, 제2대는 청년을 중심으로 삼천포 시내에서 가까운 해변에서, 제3대 는 일반 시민들이 선구동 장터에서 일제히 만세를 불렀다. 이러한 조직적 시위에 대해 일제는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 이외에도 4월 6일과 19일 곤양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 4월 10일 서포면 최범술 주도의 만세시위, 4월 16일 곤양 장날 의거 등이 있었다. 사천 지역에서는 천도교·불교 등 종교계 인사, 공립학교 교사와 학생, 서당 훈장과 학생, 부역하던 인 부들까지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사천 조직적인 의거, 3개 대로 나누어 독립만세를 외치다 일제강점기 사천 읍남면 선진리 전경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3월 31일 진영 장날 의거가 일어났다. 주동자 김우현은 하계면 서기였다. 4월 5일 진영 장날에는 서당 학 생 30여 명이 대장기를 장대에 높이 달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3월 30일 김해읍 중앙거리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4월 2일에도 만세시위가 전개되었다. 세브란스의학 전문학교 학생이었던 배동석이 임학찬, 배덕수 등과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4월 12일에는 장유면에서 의거가 일어났다. 군중들은 만세를 부르고, 북을 치고 나팔을 불면서 무계 시장으 로 시위 행진했다. 3.25 삼천포 만세시위 <공포로 해산. 주모자들 체포> (매일신보, 1919. 3. 30.)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곤양공립보통학교생들과 만세시위했던 김진곤 판결문 (징역 6월) 「출처 국 가기록원」 만세시위가 일어났던 김해읍 전경 (1914) 「출처 국립중앙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