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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Ⅳ . 해 방 이 후 독 립 운 동 의 기 록 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Ⅳ . 해 방 이 후 독 립 운 동 의 기 록 60 61 오경팔 선생 인터뷰 모습 (2019) 「출처 경상남도기록원」 오경팔(吳慶八) 선생은 일제강점기 말 창원에서 만들 어진 ‘청년독립회’의 단원이면서 유일한 생존자다. ‘청년독립회’는 42년 7월경 10대, 20대의 청년 10명이 독립운동을 위하여 만든 청년조직이다. 일제강점기 말 당시 상황에서는 독립운동을 위한 목적으로 결성된 ‘청년독립회’ 결성 자체를 획기적인 사건으로 볼 수 있다. ‘청년독립회’는 신사참배 참석 않기, 학생들에게 신사참배 불참 권유하기 등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특히 ‘청년독립회’는 ‘조선독립만세’ 글자를 벽보로 만들어 창원역, 전신주 등 사람들 눈에 잘 띄는 장소에 붙였다. 이 벽보사건을 ‘창원만세사건’이라고 한다. 이 사건으로 ‘청년독립회’ 단원들은 1944년 12월 치안 “ 우리는 일본이 패망할 것으로 알고 못 쓰는 책 종이를 뜯어 ‘조선독립만세’ 라 쓴 것을 창원역 앞 지하도, 다리 위, 전신주에 붙였습니다.” “사상범으로 진해 헌병대에 체포되어 62일 동안 취조를 받았습니다.” “취조요? 매일 맞고, 거꾸로 매달아 코에 물을 넣고, 뺀치로 손톱을 누르는 고문을 당했습니다.” “ 이감 간 부산형무소에서는 장티푸스가 유행하여 여러 사람이 죽었습니다. 저도 장티푸스로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저는 부산형무소에서 해방이 되고 나왔습니다. 고문 후유증으로 병원에 갔다와야 했습니다.” “ 해방되고 같이 나왔던 김명수는 고문 후유증으로 한달만에 죽었습니다. 김명수가 위독하다며 죽기 전에 나를 보고 싶다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김명수 집에 겨우 도착했을 때 이미 형은 죽은 뒤였습니다.” “명수는 한 달, 백정기 형은 형무소에서 나온 지 보름 있다 죽었습니다.” 아직 독립운동은 끝나지 않았다 오경팔(吳慶八, 1929~생존) 1942년 창원 청년독립회 조직 창원만세사건을 주도하다 일제의 패망 예측 징용 반대, 신사참배 거부 ‘조선독립만세’ 벽보 부착 1944년 12월 치안유지법 위반죄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 유지법 위반죄로 일본 헌병대에 체포되어 광복 전후 까지 7~8개월 동안 감옥살이를 했다. ‘창원만세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한 단원 중에 고문 후유증으로 출옥 후 보름과 한달만에 2명이 순절하였다 . ‘청년독립회’ 단원이 감행한 ‘창원만세사건’으로 감옥살이를 한 김광수, 김명수, 박대근, 박상규, 배장실 , 장재상, 조문대, 최을택 8명은 유공자가 되었으나 함께 감옥살이를 한 오경팔과 백정기 2명의 수형기록만 훼손되어 남아있지 않아 유공자가 되지 못했다. 지방자치단체들이 지역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독립운동에 대한 연구와 독립유공자를 찾는 과정에서 지역의 독립운동사가 밝혀지기 시작했다. 『증보함안항일독립운동사』(함안문화원, 2011), 『거제근현대문헌총서3』(2015)거제문화원향토사 연구소, 『고성독립운동사』(2015)고성문화원, 『소외된 역사, 경남여성독립운동』(광복회 경상남도지부,201 9), 『경남 항일독립운동참여자록』(마산보훈지청, 2001), 『의령의 항일독립운동사』(의령문화원, 2017), 『 일제시기 통영의 3.1독립운동과 민족운동의 전개』(통영문화원, 2003), 『밀양의 항일독립운동가』(사단법인 밀양독립 운동사연구소, 2014), 『합천군 3.1독립만세운동 자료집』(합천문화원, 2018), 『사천 항일독립 운동 사』(사천 문화원, 2018) 등이 편찬되었다. 기록과 기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