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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Ⅲ . 경 남 의 독 립 운 동 가 들 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Ⅲ . 경 남 의 독 립 운 동 가 들 52 53 제영순, 조복금 비롯한 부산 적색노조사건 판결 (중외일보, 1931. 12. 3.)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조복금(趙福今, 1911~미상) 하동사람이다. 1926년 진주 여자잠업강습소를 졸업했다. 1928년 7월 1일 하동군에서 김한순, 제영순 등과 함께 근우회 하동지회를 조직하고 서무재정부를 맡았다. 1930년 6월 1일 하동청년동맹 집행위원 겸 여자부장으로 선출되었다. 이후 부산진에 있는 조선방직회사 직공이 되어 노동운동에 참여하였다. 제영순 등과 함께 ‘격문사건’ 에 연루되었다. 1931년 제영순과 함께 『노동자(勞動者)』 라는 신문과 격문 약 150부를 인쇄하여 각 공장에 배포하다 체포되었으나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애족장 애족장 12월 8일 최봉선을 비롯한 통영 시민대회 관련자 판결 (매일신보, 1927. 12. 12.)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최봉선(崔鳳善, 1904~1996) 마산사람이다. 마산 의신학교 재학중 김남준(金南俊), 이수학(李秀學), 안음전(安音全) 등과 함께 결사단을 조직하여 독립만세 시위운동을 계획하였다. 1919년 3월 21일 의신학교, 창신학교 학생들과 장터에 모인 군중까지 3,000여명과 함께 학생중심의 시위를 벌였다. 1927년 3월에는 통영군의 친일파이자 경상남도 평의원인 김기정(金淇正)을 성토하는 시민대회에 참여했다. 김기정은 “조선인에 대한 교육은 필요하지 않으며 조선어로 통역하는 것을 금해야 한다”는 매국적 발언을 했기 때문이다. 1년 8개월간 동안 옥고를 치렀다. 진해 웅천에서 남편 조봉암과 찍은 사진 「출처 김씨박물관」 김조이를 뒤 쫒 는 경기도경찰부 (매일신보, 1932. 2. 2.)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김조이(金祚伊(金隱谷), 1904~미상) 창원사람이다. 계광학교를 다녔다. 경성여자 고학생상조회 회원으로 참여하여 가내수공업으로 학비를 마련했다. 1924년 6월 조봉암과 결혼했다. 1925년 허정숙, 주세죽과 함께 사회주의청년단체인 경성여자청년동맹을 창립했다. 여성해방 서적 연구·토론, 여성노동자 위안 음악회 개최 등의 사업을 펼쳤고, 무산아동학원 설립, 여성을 위한 문고 설치, 학술강좌 개최 등을 계획하였다. 경성여자청년동맹, 조선공산당 재건을 위해 노력하던 중 체포되어 1934년 징역 3년을 선고 받았다. 건국포장 김해여자청년회 하기강좌 개최 (중외일보, 1927. 8. 10.)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성여자청년회 ‘국제무산부인(無産婦人)데이[현, 세계 여성의 날]’ 기념 강연 개최 (중외일보, 1927. 3. 11.)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여성운동가들 일제강점기 경남지역에서도 항일여성단체와 여성독립운동가들이 활동했다. 양산부인회(1922년), 진주여자청년회(1925년), 통영여자청년회(1926년), 통영부인상회, 진해부인회(1931년), 고성여자청년회 등이 있었다. 사상단체도 있었다. 여자청년회(여청) 등인데 지역별로 조직되었다. 창원여청동맹, 창원프로여성동맹, 통영여청, 통영프로여성동맹, 김해북광회, 김해 신진여자회, 김해여청, 밀양여청, 하동부인회 등이다. 웅천청년회관 개관기념공연을 마친 뒤의 기념 사진, 남장한 여성들이 보인다. (1930년) 「출처 김씨박물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