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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Ⅲ . 경 남 의 독 립 운 동 가 들 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Ⅲ . 경 남 의 독 립 운 동 가 들 46 47 해외에서 활동한 경남사람들 22일 부산지방법원에서 3년 선고 (조선시보, 1921. 3. 24.)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고인덕(高仁德, 1887~1926) 밀양사람이다. 의열단장 김원봉과 밀의하여 중국 상해에서 구입한 폭탄을 휴대하고 밀양으로 돌아와 최경학에게 폭약과 폭탄제조기를 주었다. 최경학은 폭탄 2개를 만들어 1920년 12월 27일 밀양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했다. 이로 인해 고인덕은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았다. 1년 6개월 만에 가출옥하여 다시 폭탄과 무기를 준비하고 배중세 등과 함께 거사하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다시 투옥되어 1926년 감옥에서 심장병으로 순국하였다. 황상규(黃尙奎, 1891~1931) 밀양사람이다. 만주로 망명하여 김원봉과 함께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1920년 체포되어 7년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신간회 중앙간부, 조선어학회 간부 등을 역임했다. 황상규의 죽음에 대한 상해 임정의 조문 (1931년) 「출처 양산시립박물관, 『2019년 양산시립박물관 특별기획전- 1919 양산으로부터의 울림』, 2019.」 광복회를 조직한 손일민 등 15명에 대한 1심 공판 내용 중 일부 (매일신보, 1922. 3. 17.)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손일민(孫逸民(孫一民), 1884~1940) 밀양사람이다. 1912년 만주로 망명하였다. 환인현에서 동창학원을 설립하여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1920년 1월에 길림의 대한군정사에 서 무장독립투쟁을 적극 지원하였다. 1934년 중국 남경에서 민족혁명당 결성에 참여하였다. 1937년에는 임시정부 임시의정원의 상임위원이 되어 조국 독립에 기여했다. 독립장 독립장 1919년 10월 1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국무원 기념사진 「출처 국가보훈처, 『이달의 독립운동가 생애와 공적』, 2018.」 윤현진(尹顯振(石山), 1892~1921) 양산사람이다. 안희제와 함께 비밀결사 대동청년당에서 활동하다, 양산의 1919년 3·1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상해로 망명하여 상해임시정부에 참여했다. 초대 재무차장에 선임되어 임시정부의 재정문제를 해결했다. 임시정부 재무위원장과 내무위원장을 역임했다. 과중한 업무로 인해 만 29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독립장 애국장 윤세주(윤소룡) 판결 기록 (1931년) 「출처 국가기록원」 윤세주(尹世胄(尹小龍), 1901~1942) 밀양사람이다. 1919년 밀양지역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이후 만주에서 의열단에 입단하였고, 단원 곽재기 등과 함께 조선총독부·동양척식회사·경성일보사 등을 폭파할 것을 결의하였다. 체포되어 7년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출옥후 중국에서 항일운동을 계속했다. 김원봉과 조선의용대를 편성하여 항일전투를 전개하였다. 독립장 김관제(金觀濟, 미상) 고성사람이다. 1909년 안희제, 남형우 등과 함께 대동청년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윤세복 등과 함께 봉천성 환인현에 동창학교를 설립하고 교사가 되어 대한 독립사상의 고취와 교육구국운동에 종사하였다. 1915년에는 일신학교(日新學校)를 설립하여 교사로 활동했다. (좌) 김관제, 윤상태에게 상해 임정의 조완구, 김구가 보낸 안부문글 (우) 김관제와 김창숙에게 상해 임시정부 이시영이 안부를 묻는 서간문 「출처 양산시립박물관, 『2019년 양산시립박물관 특별기획전-1919 양산으로부터의 울림』, 2019.」 애족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