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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거수 「출처 고성문화원, 『고성독립운동사』, 2017.」 혈성단원 홍수원 검거 기록 (1919. 11. 8.) 「출처 국가보훈처」 홍수원 「출처 변지섭수집자료」 1920년 관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퇴직을 권고하는 글을 보냈다. 「출처 변지섭수집자료」허재기 「출처 변지섭수집자료」 박봉제와 11인이 회합해 조직한 진양의 ‘독립의우회’ 투쟁기록 「출처 변지섭수집자료」 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Ⅲ . 경 남 의 독 립 운 동 가 들 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Ⅲ . 경 남 의 독 립 운 동 가 들 44 45 박거수(朴居洙, 1887~1928) 고성사람이다. 1908년 재산을 털어 철성의숙을 설립하였다. 철성의숙은 애국애족정신으로 나라를 되찾고 조국의 완전독립을 교육목표로 삼았던 민족교육기관이었다. 학생들에게 애국가를 부르게 하고 운동장 주변에 무궁화를 심었고, 개천절에는 대운동회를 열어 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켰다. 1910년에는 고성체육회를 조직하여 체육진흥에 기여했다. 1919년 고성지역 3·1만세시위를 주도했다. 이후에는 고성청년단을 조직 하여 민족의식과 독립의식을 고취했고, 신간회에도 적극 참여했다. 박봉제(朴奉濟, 1897~1939) 진주사람이다. 1919년 만세시위가 일어나자 애국청년들을 모아 비밀결사조직인 ‘독립의우회’를 조직하고 회장이 되었다. 1919년 3월 20일 미천면 동매리 마을 앞 만세시위 를 주도하였고, 두루마기를 찢어 ‘대한독립’이라고 크게 쓴 기를 장대에 매달아 시위에 앞장섰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체포 되었다. 1939년 2월 귀향했으나 일본에서의 고문 후유증으로 5월에 만4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홍수원(洪秀瑗(洪基守), 1896~1937) 진주사람이다. 1919년 4월 비밀결사 ‘혈성단’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었다. 독립자금을 모집하여 상해임 시정부를 지원하였다. 1919년 6월 종교단체를 가장한 항일결사 ‘경남전도회’를 만들어 상해에서 발행한 대한민보를 국내의 각 교회에 배포하였다. 1937년 5월 체포되어 고문 끝에 순국하였다. 허재기(許在其, 1887~1969) 고성사람이다. 1919년 3월 고성지역의 만세시위를 주도했다. 만세시위 이후 ‘대한독립동맹’이라는 이름으로 조선사람으로서 관직에 있는 사람들에게 퇴직권고문을 작성하여 관공서로 보냈다. 1920년 상해임시정부 지원을 위한 군자금을 모금하다 체포되어 1년 6개월의 형을 복역했다. 애족장 대통령표창 애족장 강달영 판결문 (1919년) 「출처 국가기록원」 강달영(姜達永, 1887~1942) 진주사람이다.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다 1년 6개월 복역하 였다. 1921년 조선노동공제회 창립에 참가했으며,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 다. 1925년 조선공산당 결성으로 당원이 되었다. 1926년 6·10만세운동 준비에 적극 참여하다가 체포되어 6년 감옥살이를 하였다. 만주 정통단 군자금 청구 혐의로 신의주검사국에서 조사. 3일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남 (중외일보, 1927. 8. 7.)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배덕수(裵德秀(裵大秀), 1895~1970) 김해사람이다. 1919년 4월 2일 김해 장터 의거를 주도하다 6개월의 옥살이를 했다. 1920년 김해청년회결성에 참가하고, 1925년에 조선공산당에 입당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