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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Ⅱ . 경 남 독 립 운 동 , 조 직 과 활 동 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Ⅱ . 경 남 독 립 운 동 , 조 직 과 활 동 36 37 일본의 식민지수탈이 시작되자, ‘내 살림 내 것으로’, ‘조선 사람 조선 것으로’ 등의 구호를 앞세우고 물산장려운동이 시작되었다. 토산품 애용, 근검저축, 금주·단연 등을 외쳤다. 경남지역 에서도 물산장려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마산물산장려회, 삼랑진물산장려회, 사천물산장려회 등 이 조직 되었다. 이외에도 많은 단체들이 참여했다. 마산기생동맹은 의복을 토산품으로 착용하고, 어길 시 벌금 1원을 납부하고, 벌금은 빈민들 구제로 사용할 것을 결의했다. 진주부인회는 단연실시 운동을 벌였다. 하동의 자조회는 소비절약, 토산물장려 등을 결정했다. 이외에도 청년단체 등 많은 조직들이 토 산물장려, 저축, 생활개선, 단연금주운동 등에 나섰다. 학생운동은 1920년대부터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서 하나의 부문운동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 진주에 서는 1927년 6월 진주공립농업학교 학생들의 시위가 있었으며, 1928년 7월 진주고등보통학교 와 진주 공립농업학교의 연대 맹휴가 있었다. 두 학교 학생들은 공동의 요구 조건으로 ① 조일공학제를 폐 지 하라 ② 노예적 교육을 폐지하라 ③ 조선어 시간을 연장하라 ④ 조선 역사 및 조선어를 교수하라 ⑤ 교 내 언론·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라 등을 제시하며 동맹휴교를 시작했다. 마산창신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폐교되었다. 물산장려운동 학생운동 밀양 물산장려회 취지서 「출처 독립기념관」 진주농업학교학생 72명 검거 <천장절 당일 독립만세 계획> (매일신보, 1920. 9. 11.)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진주 고보와 농업고의 동맹 휴교 <진주고보, 농업양공립학교 연맹 휴학. 학생들 연맹 퇴학원 제출. 당분간 휴교. 이후 등교에 불응하면 퇴학처리 통지> (매일신보, 1928. 7. 13.)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마산공립상업학교 만세시위 계획 <13일 실행 예정. 12일 주모자 3학년 3명 검거.> (중외일보, 1930. 1. 14.)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하동 공립보통학교 동맹휴학 < 22일 6학년 동맹휴학 실시. 교장이 하동공립보통학교와 하동실업보습학교장을 겸임하여 무성의함이 원인> (매일신보, 1927. 11. 26.)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진주 고보생 240명 무기 정학 <동맹 휴교에 참여 이유로 20일 처분> (매일신보, 1930. 1. 23.) 「출처 독립기념관」 마산 창신학교 비운 <신사참배 거부로 폐교 위기> (매일신보, 1939. 2. 10.) 「출처 독립기념관」 창신학교 제10회졸업예배 (1920년) 「출처 창신고등학교」 경남의 저금 장려 <경상남도청 조합 설립. 저금 장려> (매일신보, 1913. 3. 13.) 「출처 국립중앙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