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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시위가 일어난 합천읍 전경 (1920년대) 「출처 합천군사편찬위원회, 『합천군사』, 2013.」 24 Ⅰ . 3 · 1 운 동 과 경 남 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합천지역의 3·1운동은 3월 18일 삼가 시위로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장날을 중심으로 시위가 크게 일 어났는데 시위 규모도 컸고, 시위의 모습도 격렬했다. 3월 19·20·22일 합천 읍내 시위, 3월 20일 대병면 창리 시위, 3월 21일 초계면 초계 시위로 이어졌다. 대 병 시위 와 초계 시위는 모인 군중이 3천 명에서 4천 명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위 열기는 3월 23일 삼가 장터 의거에 서 최고 절정에 이르렀다. 합천군민뿐만 아니라 의령군 대의면, 산청군 생비량면에서 모인 만세 참여자는 1만3천 여 명이 었다. 군중들은 주재소·면사무소 등 일제 관공서를 부수고, 문서를 소각하였으며 전선을 절단하여 통신 을 차단 하였다. 그 때문에 일본 군경의 무차별 사격과 탄압으로 13명이 현장에서 순절하였다. 합천 대규모 시위였고, 격렬했다 왼) 3.19 합천 만세시위 (매일신보, 1919. 3. 22.) <삼백여명 참여. 주모자 체포>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오) 3.21 합천 만세시위 (매일신보, 1919. 3. 25.) < 경관주재소와 우편국 습격. 발포진압. 사상자 발생. 순사1명 부상.>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10 45 19 10 45 19 Ⅱ . 경남독립운동, 조직과 활동 3·1운동 이후에도 경남지역의 독립운동은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의열단은 무력투쟁을 전개했고, 유림들은 전 세계에 독립을 요구했다. 인간해방을 목표로 한 형평운동, 신간회와 근우회 등의 독립활동이 전개되었다. 노동자와 농민은 노동조합, 농민조합 결성을 통하여 항일운동에 나섰다. 청년·학생들은 민족독립에 앞장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