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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함양 만세시위 <2일 헌병분견소 습격. 발포 진압. 4명 사망. 부상자 발생> (매일신보, 1919. 4. 6.)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함양 만세시위에 참여한 김한익 판결문 「출처 국가기록원」 3.22 거창 만세시위 <발포진압. 1명 사망> (매일신보, 1919. 3. 25.)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만세시위 관련 부산지방법원 거창지청 처리서류 <체포 48 중 기소 8, 불기소 12, 미결 28> 「출처 국가보훈처」 파리장서운동에 서명한 곽종석 판결문 「출처 국가기록원」 22 23 Ⅰ . 3 · 1 운 동 과 경 남 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Ⅰ . 3 · 1 운 동 과 경 남 3월 28일 함양읍 장날 의거를 정순길, 윤보현, 정순귀, 노경식 등이 주도하였다. 4월 2일 2차 만세시위가 김한익 등에 의해 주도되었다. 하승현과 윤영하가 만세시위 현장에서 순절하였다. 3월 31일 안의읍 장날 의거는 서하면 봉전리 김병창, 임채상 등과 지곡면 보산리 급천서당 학생 김채호 등 이 주도 하였다. 함양 의병에 이어 만세시위도 치열했다 3월 20일 가조면, 가북면의 농민들이 장기리 장날에 독립만세를 외쳤다. 3월 22일 거창읍 장날 의거 계획이 누설되어 김채환, 김호, 오문현, 어명철, 최영순 등이 체포되었다. 이에 가조면, 가북면의 3천여 명의 군중들이 독립만세 시위를 벌이다가 일본 헌병대의 발포로 4명이 순절하였다. 4월 8일에는 위천면, 북상면, 마리면 등지에서 시위가 일어났다. 거창 가조와 가북에서 만세시위 일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