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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고성 장날 만세시위 <수백명 만세시위. 주모자 7명 체포> (매일신보, 1919. 4. 6.)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3·1절 기념일 대성초등학교에서 연설하는 배만두 (1950년대) 「출처 고성문화원, 『고성독립운동사』, 2017」 고성읍 시장 만세시위에 참여한 김진 만 판결문 「출처 국가기록원」 18 19 Ⅰ . 3 · 1 운 동 과 경 남 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경 남 독 립 운 동 의 기 록 , 1 9 1 0 ~ 1 9 4 5 Ⅰ . 3 · 1 운 동 과 경 남 3월 20일 구만면 국천 모래사장과 배둔 장터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서울 3·1운동에 참여했던 최낙 종 등이 고성으로 내려와 허재기, 최정주, 최낙희 등과 함께 모의하였다. 국천 모래사장에서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대는 배둔 장터로 행진했다. 일본 헌병과 경찰의 저지를 뚫고 배둔 장터에 도착한 시위대는 700~800명이었다 . 3월 22일 고성읍 시장에서 의거가 전개되었다. 4월 1일 고성읍 장날에는 더욱 강력한 의거가 발생했다. 3월 28일 상리면 오산리, 4월 2일 대가면 송계리, 4월 3일 영오면에서 만세시위가 있었다. 고성 일본헌병과 경찰의 저지를 뚫고 시위를 전개하다 남해 만세시위 < 다수의 군중 만세시위 참여. 총으로 해산. 부상자 발생> (매일신보, 1919. 4. 10.)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만세시위가 일어난 남해 고현 전경 (1914년) 「출처 국립중앙박물관」 남해 설천면 만세시위에 참여한 정순조 판결문 「출처 국가기록원」 4월 2일 설천면 남양리에서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하동에서 독립선언서를 구해 온 설천면의 이예모와 정순조, 정학순, 정몽호, 윤주순 등이 주도했다. 4월 4일 남해읍 장날에도 1천여 명의 군중이 만세시위를 했고, 4월 6일 고현면 포상리에서 700명의 군중이 만세시위에 참여했다. 남해 4월 2일 설천에서 만세시위가 시작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