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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준호 선생은 진양하씨 현령겅신파 30대손 일청공의 장남으로 1887년 8월 8일 고현면 포상리에서 태어났다. 일본이 강압으로 나라를 합병하고 폭정을 하게 되자 망국의 한을 안고 항일운동을 벌이고자 하던 중 1919년 3월 1일 서울에서 독립만세 운동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천도교인 동생 하준천과 함께 이예모, 전순조, 정학순,정몽호,정익주 외 여러 사람과 힘을 하하여 민중 봉기를 하기로 의논하고 각부락을 순회하면서 돌지를 규합하여 4월 3일 설천면 남양리 노상에서 군중을 모아 독립선언서는 이예모가 읽고 태극기는 정순조가 들도록 하여 모두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며 남해읍으로 나아가다가 날이 저물어 중도에서 해산하고 익일 남해 장날인 4월 4일에는 모두 가슴에 태극기를 품고 장 장꾼을 가장하여 사장으로 나와 사람이 많이 모니는 오후 세시경에 애극기를 꺼내 일제히 만세를 불러 약 1000명의 군중으로 하여금 함께 만세를 절규하게 하니 천지가 진동하는 것같았다. 선생은 주동자들의 선봉에 나서서 군청 보통학교등 주요 기관에 몰려가서 군수 기타 관리들에게 억지로 독립만세를 부르게 하고 경찰주재소에 가서는 유치인의 석방을 강요하였다. 뒷날 일본군대의 출동으로 선생을 비롯한 주동인물 23명은 모두 붙잡히고 말았는데 이 때의 선생은 33세의 혈기 방장한 시절이었다. 이 의거로 10세의 어린 아들 석우는 일병의 총탄에 부상을 당했고 선생은 2년의 모진 옥고를 치렀다. 선생은 출옥하여서도 끝내 일제의 탄압에 하거하다가 애통하게도 조국 광복을 보지 못하고 1942년 4월 5일 55세로 세상을 떠났다. 함께 묻힌 성주 이씬느 고생하며 선생을 내조하고 자녀를 잘 양육한 현부인인데 1971년 12월 21일 84세로 별세하였다. 나라를 되찾고자 외적의 충칼앞에 죽음을 무릅쓰고 항거한 선생의 애국정신은 우리 겨례 모두가 본받아야 할 민족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