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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근에 많은 묘소들도 있었지만, 역시 다른 성씨들의 묘소이었다. 이곳도 잘못된 주소 정보로 보인다. 아쉽다. 하치량(河致亮)은 경남 사천(泗川) 사람이다. 1942년 일본 대판(大阪) 북야(北野) 제2중학교 유학생으로 정승한(鄭承漢) 등 5명과 함께 항일결사인 백두회(白頭會)를 조직, 활동하였다. 하치량은 경남 하동(河東)에서 소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대판시립 계천실업학교(大阪市立 堺川實業學校)를 거쳐 북야 제2중학교(北野第2中學校)에 재학 중, 한국인에 대한 일본인의 심한 멸시와 차별을 경험하면서 독립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항일의식을 키워나갔다. 그러던 1942년 5월 그는 십삼교(十三橋) 근처 제방에서 평소 절친하게 지내던 동교생 정승한·안갑시(安甲時)·박희열(朴喜烈)·김병기(金炳基) 등과 비밀결사 '백두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들은 북야 제2중학교 3, 4학년 한국인 학생 전원을 회원으로 하고, 회원 상호간의 친목과 협력을 도모하며 한국문화를 개발시켜 앞으로 독립에 기여하고자 하였다. 하치량 등은 한국인 학생들을 회원으로 가입시켜 조직을 강화해 나가는 한편,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 항일활동을 전개시켜 나갔다. 그후 하치량은 1943년 3월 북야 제2중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였지만, 그가 조직한 백두회는 계속적으로 활동을 전개해 오다가 일경에 의해 그 전모가 발각되었다. 1944년 2월 그는 고향에서 경북 청도경찰에 의해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44년 7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소위 치안유지법·임시취체법 등으로 징역 3년을 받고 옥고를 치르다가 광복이 되어 출옥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6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