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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군(李永根)은 경남 사천(泗川)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5일 경남 사천군 곤명면(昆明面) 금성리(金城里)에서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곤명의 만세운동은 3월 18일 진주의 만세운동 소식을 접하면서 유림 출신 이영근에 의해 계획되어졌다. 평소 항일의식이 투철하던 그는 3·1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상황에서 이웃의 진주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나게 되자, 뜻을 같이하던 금성서당의 훈장 정원주(鄭元柱)·문형근(文馨根) 등에게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주장하여 동조를 받아 거사를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이영근 등은 격문과 태극기 등을 인쇄·제작하는 한편 동지를 규합해나갔다. 그리고 거사 당일인 4월 5일에는 마을앞 덕천(德川) 변에서 주민 2백여 명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이에 일제는 헌병대를 출동시켜 무자비하게 탄압하였는데, 이영근은 만세현장에서 붙잡혔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5월 19일 부산지방법원 진주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태형(笞刑) 90도를 받았는데, 장독(杖毒)으로 고초를 겪다가 1922년 8월 8일에 29세로 요절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