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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 가내 화목을 실천하셨고 항상 富(부)나 貴(귀)를 얻어도 驕(교)하지 말며 없는 자에게 施(시)하며 權(권)에 卑(비)하지말라고 자손들에게 교훈하시어 이를 가풍으로 삼으셨다. 병인 신미 두 양요때 국방을 위한 상소와 민비시해때는 토왜의병모부를 설치하여 천금을 드려 의병을 훈련시킨일과 안중근의 의거때나 민충정공의 순국때 비눈강개하고 추모의 시로써 조곡한 대의는 민족정기 발현의 진면목이라 핳거이다. 소위 의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됨을 본 공은 동향으로 되어있는 대문을 서향으로 옮기고 호 청사를 서비라 고치셨다. 이는 원수인 일제가 동쪽에 있으니 서쪽으로 돌아앉는다는 뜻이였다. 공의 최후 辭(사)인 霜膽偏悲烈士秋 彼蒼胡忍陸沈州 一生不變南音操 百死邢忘北望憂 竊念臣民今日義 難容天地此身謨 殷薇采采歌安適 西我山扉獨掩幽란 시만 보아도 삭풍한설에 송백같은 굳은 절개를 엿볼수가 있다. 경술년에 합방을 강행한 일제는 전국의 명망있는 유림에게 일왕의 소위 은사금이란 것을 주어 민심을 무마하는 술책을 썼다. 공에게도 은사금을 받으라고 여섯차례나 강요하다가 대의와 명분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완강하게 거주하는 공을 강압적인 수단으로 헌병을 파견하여 강제로 연행코저 하므로 공은 추강같은 기개로써 내 어찌 대한의 신민으로서 왜왕에게 몸을 굽힐수없다하고 거절하자 왜헌병이 일본천황의 하사금을 감히 거절하는가 하며 총칼로써 강요하므로 공은 선비는 죽일수는 있어도 모욕할수는 없는 법인데 내 이미 년로하여 백일보행도 불편하거늘 야행으로 너의들에게 끌려갈 수는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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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절하시고 그날밤 촛불을 밝히고 의관을 정제하여 북향재배하고 음독순절하시니 신해(1911) 3월 19일 鷄鳴時(계명시) 였다. 향년이 80세로 대의를 위해 순국하시였다. 공의 순절을 들은 동양각국의 지사들의 조환과 국내유림 수천명이 모여 하일 춘암 후산 축자원에 예장하니 조문객의 마필이 10여리의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때 모인 조객들이 서비계를 모우고 종친들이 호응하여 갑자년(1924)에 도곡산록에 서비정을 짓고 유림들이 모아 매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