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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단법인 선학원 1876년 개항으로 본격화된 일제의 침략책동에 편승한 일본불교는 한국불교의 예속화에 박차를 가하였다. 1910년 10월, 원종 대표 이회광이 일본 조동종과 동경에서 전문 7조의 엽합맹약을 체결하였다. 이에 반대하여, 진응, 한영, 종래 스님등이 광주 증심사에 모여 임제종을 발기하고, 1911년 2월 3일 송광하에 조선 임제종 임시사무소를 설치하였다.(관장 경운 원기, 관장대리 만해 용운) 1911년 6월 3일 일제는 사찰령을 제정하고 전문 7조와 부칙을 공포하여 한국불교를 왜색화 하고자 하였다. 이에 맞서 1912년 5월 2일 조선임제종 임시사무소를 조선임제종 중앙포교당으로 바꾸고 서울 사동(지금의 인사도) 28통 6호로 이전하였으니, 조선 총독부는 중앙포교당건립 방해, 임제종 칭호의 사용금지 등 임제종의 활동을 탄압하였다. 1919년 3.1운동에 한용운, 백용성 스님이 민족대표로 참여하였고 많은 승려와 불교계인사,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특히 만해 한용운은 독립선언서의 공약3장을 작성하였다. 또한 대한승려연합회 독립선언서가 상해에서 11월에 국문, 중문, 영문으로 발표되어 민족불교의 독립의지를 밝혔다. 1921년 11월 30일 남전, 도봉, 석두 스님 등이 만해스님을 중심으로 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고 민족불교의 왜색화, 세속화를 막고, 사찰령 철폐하여, 한국불교의 정맥을 수호하고 계승하기 위해 '선학원'을 설립하였다.1922년 3월 한용운, 오성월 스님등이 선풍진작 등을 기치로 선우공제회를 창립하였는데 이는 식민지 불교정책에 항거하는 민족불교 수호를 천명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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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제1차 수좌대회를 계기로 선학원은 민족불교 수호와 불교대중화에 진력하였고, 1934년 12월 5일 재단법인 조선불교중앙선리참연구원으로 인가를 받았다. 1935년 개최된 제3차 전국수좌대회에서 선학원이 민족불교 수호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조선불교선종을 창종하였고, 1941년 유교법회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해방이후 선학원은 친일잔재를 청산하고 한구굽ㄹ교의 전통을 회복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54년 6월 24일 선학원에서 불교정화추진발기회를 개최하고, 다음날 교단정화운동추진준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8월 24~25일 선학원에서 제1차 전국비구승대표자회의를 개최하고 금오, 적음, 동산, 청담, 효봉 스님등을 정화사업을 추진하기 위한 지도부로 선출하였다. 1955년 8월 전국승려대회를 기점으로 종권을 비롯한 전국 각 사찰의 운영권이 비구성측으로 넘어가는 국면으로 전환되었다. 이로써 해방 이후에도 선학원을 중심으로 한국불교의 전통과 민족불교를 수호하고자 했던 노력은 비구승들의 정화운동등을 통하여 1962년 통합종단 대한불교 조계종의 탄생으로 나타났다. 선학원은 일제식민지 시대에는 항일 "민족불교의 성지"로, 광복후에는 왜색불교를 청산하는 "정화불교의 산실"로서 현 "대한불교조계종의 모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