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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 대한남아로서 어찌 통분을 하지 않겠는가. 폭악무도한 일제의 강압정치로 숨통이 막히고 민생이 도탄에 빠저들던 1919년 3월 1일을 기해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민족의 울분이 노도처럼 독립만세의 하성으로 나라안 방방곡곡에서 메아리치니 구국의 투지에 불타던 공께서도 뜻을 같이하던 이종철 이대성 유판술 동지들과 손을 잡고 의거에 나섯다. 공은 먼저 독립선언문 수백매를 인쇄하는 일방 3월 1일 밤에는 공의 집에서 대형태극기를 만들어 성내면사무소 문루에 게양하고 선언서와 격려문을 철포하며 13일에 학교앞 운동장에 많은 인파가 운집해 줄 것을 우국애정으로 호소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이 흥덕면 주재소에 미리 알려져 거사의 뜻을 이루지 못한 공등은 총검을 앞세워 달려온 왜경들에게 붙들려 필설로 표현할 수 없는 혹독한 고문을 받은 끝에 2년형 선고받고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였다. 영어의 몸이 된 공은 옥중 동지들과 상통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절규하니 일제의 고문은 더욱 극심하여 끝내 옥중 순절을 당하고 말았다.이 날이 바로 1921년 7월 13일로 공의 나이 21세였다. 정부에서는 공이 가신지 66주년이 되는 1982년 8월 15일 광복절을 기해 대통령표창을 추서하고 공의 위훈을 길이 새기도록 하였다. 이제 공의 계자 제행군이 추진위원회의 협찬을 얻어 이 곳에 공의 기적비를 세우게 되니 충의정신을 선양하는 돌 비로 천추에 빛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