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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의공 운석 나상호 선생은 을사명현이신 송재 나세찬 선생의 14대 손으로 1887년 정해 5월 2일 한실마을에서 출생하여 간재 전선생 문하에서 강학하시고 19세때 부터 여생을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일제에 항거하시다가 돌아가셨다. 1905년 11월 을사보호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통분을 참지 못하고 땅을 치며 통곡하신 곳이며,1908년에는 의병과 일본군이 싸웠던 조국수호의 항전지이다. 지금도 옛 성터의 흔적이 남아 역사적으로도 유서깊은 곳은 틀림이 없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방이 되자 자주독립을 외치며 동지들을 규합하여 일제를 규탄하였고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승하하자 이곳에 망곡단을 만들어 초하루 보름날에 통곡 북향 4배로 백성된 도리를 잊지 않으셨다. 기미만세운동시에는 이곳에서 봉화를 올리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곳이며 고종황제 국장시에는 선생께서 조문단을 이끌고 상경하여 친필로 만사하시고 귀향하신후 삼남일대 애국유림을 방문 조국의 주권회복과 자주독립을 주창하시면서 일제 신사참배반대 운동을 펴는 한편 광무황제숭모단향비 건립기금을 모아 1923년 계해 7월 25일 여덟개의 돌 기둥을 세우고 3간 맞배집 기와지붕에 풍경을 단 비각과 비를 세우셨다. 그때 이 운동에 협력하신 애국 유림은 금성 나희문(羅希文) 나우순(羅虞淳) 나윤중(羅允中) 나상철(羅相喆) 나승규(羅承奎) 나성서(羅聖瑞) 나종희(羅鍾熙) 장흥 고봉진(高鳳鎭) 경주 김열(金烈) 상산 김영기(金英基) 김선기(金善基) 광산 김홍빈(金洪彬) 김해 김귀병(金貴炳) 진주 김기채(金奇採) 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