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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묵(朴永黙)은 경상남도 하동(河東) 사람이다. 1919년 4월 6일의 고전면 주교리(古田面舟橋里) 장날을 이용하여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같은 마을의 이종인(李宗仁)·정상정(鄭相正)·정의용(鄭宜鎔) 등 33인과 더불어 일신단(一身 )을 조직하고, 목숨을 바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하였다. 그는 이들과 함께 4월 6일의 주교리 장날을 거사일로 정하고 일신단 동지인 정재기(鄭在基)에게 하동읍에 가서 독립선언서를 구해오도록 하였다. 그러나 정재기가 도중에 체포되어 일제는 더욱 삼엄한 경계를 펴게 되었다. 4월 6일 오후 1시 40분경, 주교리 장터에 1천여명의 장꾼이 모이자, 그는 미리 만들어 놓은 태극기를 들고 단상에 올라가 간단한 연설을 한 뒤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장터 요소요소에 배치되어 있던 일신단원 및 장꾼들이 일제히 이에 호응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때 조선인 경찰 박도준(朴道俊)과 일본 헌병 3명이 출동하여 제지하자, 시위군중은 그들의 총검을 빼앗는 한편 모자와 제복을 벗기고 구타하였다. 그러나 급거 응원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의 무력행사로 시위군중은 해산하였다. 다음날 아침, 일본 헌병 20명과 경찰 10명이 주동자를 체포하기 위하여 그의 고향인 성천리(城川里) 지소부락(紙所部落)에 총을 난사하며 들이닥치자, 그는 미리 부녀자와 아이들을 동리 뒤의 삼봉산(三峰山)으로 대피시킨 뒤, 정상정·이종인·정의용과 함께 주동자임을 자처하며 체포되었다. 그는 결국 이해 5월 16일 부산(釜山)지방법원 진주(晋州)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2년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