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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6 ‘2차 유림단 사건’이라 부르는 이유는 주된 모금의 대상이 유림이었 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유림들은 차가운 반응을 보였다. 그나 마 어렵게 모은 군자금도 큰 액수가 아니어서 김창숙은 뜻을 함께하 는 동료들과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했다. 오랜 회의 끝에 조직적인 군 대를 기르는 것에서 개별적인 의거 활동을 지원하는 것으로 계획을 바꾸었다. 모금한 돈을 가지고 상하이로 돌아간 김창숙은 비밀리에 권총과 폭 탄을 사들였고 의열단 의 일원이었던 나석주 를 만나게 된다. 이 자 리에서 김창숙이 나석주에게 전달한 권총과 폭탄은 훗날 그가 동양척 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질 때 사용되었다. 1927년, 나석주의 배후로 김창숙이 지목되면서 그도 상하이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체포된 이후 김창숙은 14년 형을 선고받고 1928년부터 대전형무소에 갇히게 되었는데, 이때 부터 스스로를 앉은뱅이 노인이라는 뜻의 ‘벽옹(躄翁)’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고문의 후유 증으로 걷기가 힘들어진 자신의 처지를 나타낸 것이었다. 김창숙은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 국장을 받았다. 2차 유림단 사건 신문기사 의열단 1919년 김원봉이 조직한 무장 독립 운동 단체로 식민지 기관에 폭탄을 던지는 등의 의거 활동을 주도했다. 나석주 의열단에 가입하여 1926년 경제 침 탈을 주도했던 일제 기관인 동양척 식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졌다. 1962 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