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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달하니 공과 한음 이덕형은 명에 원병을 청할것을 추정하였다. 이에 왕은 한음을 명에 보내고 공은 난시에 평판으로서의 중책때문에 군사를 계속 관장하였ㄷ. 그후 대가가 평양을 평양을 떠나 영면을 거쳐 박천에 있을때 평양함락의 패보가 급달되니 많은 호종배들이 동망쳐버리고 남은 사람은 약간명에 불과하였다. 공이 선두에 나서 길을 인도하여 대가는 마침내 의주에 당도하였다. 공의 발의에 따라 왕은 의주에 오래 머므를것을 정하고 삼남지방에 사람을 보내어 행자소의 소재를 널리 알림으로써 비로소 왕명이 통하고 전국도처에서 의병이 일어나게되었다. 한편 명은 원병을 보내어 평양을 회복하고 드디어 선조 26년 10월에 서울로 환도하게 되었다. 선조28년에 공은 이조판서겸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지의금부사가 되고 이듬해 명에서 일본국왕을 책봉하게 되자 부사 양방형의 청으로 공이 접봉사가 되는 동시에 의정부우참찬이 되었다. 양방형은 공을 매우 존경하여 동국에 공이 있으니 어찌 외국이 능멸하리오 하였다. 정유년에 다시 난이 일어나자 공은 또다시 병조판서가 됨으로써 임진란이후 5차에 걸쳐 병판의 중책을 맡게되었다. 공의 탁월한 결륜으로 왜란이 평정되었으니 그 공적은 길이 남을 것이다. 선조31년에 우리나라에 와있던 명의 병부찬획 정응태가 명제에게 글을 올려 우리나라를 무고하니 선조가 진노하고 공을 발탁하여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우의정겸 영경정감춘추관 사오성부원군에 봉하고 이어 진주사로 명에 가서 해명케하였다. 공의 탁월한 외교활동으로 마침내 명제의 오해를 풀게하고 정응주를 해임시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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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33년 경자에 공은 도체찰사겸 도원수가 되어 남도군무를 살피고 돌아와 안민방해 16조를 올리고 곧 영의정으로 승차되었으며 선조37년 갑진에는 호성공신 1등에 봉해졌다.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니 득세한 정인홍등 북인들이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무고하여사사케하고 끝내는 인목대비를 서궁에 유폐하여 대관 정조 윤신등이 폐모론을 추장하기에 이르렀다. 공은 삼강오륜이 멸하게 됨을 한탄하고 폐모론을 극력 반대하여 상소하니 마침내 공은 관직이 삭탁되고 북청으로 유배되었다. 광해군 10년 무오5월 13일 63세의 생애를 배소에서 마치었다. 광해군은 곧 공의 관작을 다시 내리고 시호를 문충이라하고 예를 갖추어 장사할것을 명하였다. 당쟁과 임진 정유의 왜란으로 온 나라가 혼미를 거듭하고 있을때였다. 난시에는 왕을 호종하고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운 명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