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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벌써 반세기가 넘게 흘렀으나 전쟁이 남긴 상흔은 분단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현재까지도 여전히 아물지 않는 상처와 함께 민족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리고 있다. 돌이켜 보면 해방이후 1953년 정전이 되기까지 한국전쟁을 전후로 한 좌우 이념대립의 시기는 우리 민족이 처한 가장 비극적인 시대가 아닌가 한다. 이 시기 민간인이 소위 빨갱이라는 죄목으로 초법적인 국가폭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일이 발생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침묵으로 외면하였기 때문에 정리되지 않은 과거사 문제가 사회적 갈등요인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원혼들의 피맺힌 한을 치유하지 못하여 희생자와 유가족들은 통한과 통곡의 지난 반세기 동안이나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영암군만 해도 국립도서관 자료에 따르면 여순사건과 6.25전쟁 전후로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이 7,175명으로 기록되어있으나 당시 살아남은 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중 영암군에서 가장 피해가 많이 발생한 금정면 지역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지리적 여건 때문에 국사봉을 중심으로 빨치산들이 집결, 유격대를 구성하고 사령부가 자리 잡게됨에 따라 빨치산과 군경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군경은 물론 민간인 희생자도 수없이 발생하여게 된 것이다. 이 와중에 무고한 양민들은 좌익의 선전에 속고 협박에 못 이겨 억지로 협조하는 일이 생겨났고, 군경들의 토벌작전이 전개되면 빨갱이, 부역자로 몰려 마을은 불태워지고 주민들은 죽임을 당하는 일이 반복되었다. 마침내 1951년 1월 군경의 대대적인 빨치산 토벌작전이 전개되면서 금정면 연보리 냉천마을에서 처참한 집단학살 사건이 발생하였다. 당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김황기, 김남래씨 등의 증언에 따르면 1월 17일 새벽 토벌대의 척후병이 여운재를 넘어오다 빨치산 보초병에 의해 저격되면서 비극이 사작되었다고 한다. 갑자기 마을로 들이닥친 토벌구은 30여 가구에 살고있는 주민들과 타지에서 온 피난민들을 공터에 모이게 한 후 무차별 사격을 가하여 130여명을 죽이고 마을은 불태워 버렸다고 한다. 이때 죽이지 않은 어린애가 구덩이에 버려진 엄마 젖을 물고 밤새워 울다가 나중에는 기진하여 죽어간 기막힌 사연은 듣는 이로 하여금 동족상잔의 비극에 새삼 치를 떨게 한다. 이 외에도 1949년 12월 시행된 국가보안법에 따라 좌익사상에 물 든 사람들을 전형시켜 보호하고 인도한다는 취지로 결성된 보도연맹은 대한민국 정부 지지, 북한정권 반대, 공산주의사상 배격등을 강렬으로 삼았음에도 6.25전쟁이 일어나자 초기 후퇴 과정에서 이들을 무차별 검거하여 즉결처분을 단행했으나 지금까지도 정확한 해명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영암관내에서도 처형당한 사실이 유족들의 증언에 의해 확인되고 있다. 이러한 민족적 비극이 다시는 발생해서는 않된다는 염원과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의 영혼을 달래고 유족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풀어주기위해 뜻있는 인사들이 위령탑 건립에 나섰다. 2006년 3월 27일 6.25전쟁희생자위령탑 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63명)하여 유족중의 한명인 금정면 아천리 김정두씨를 위원장으로 추대한 위원회에서는 언론을 통하여 영암지역 민간인 학살사건을 널리 알리고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진상조사를 요청하는 한편 영암군(군수 김일태)에서 5천만원 지원받고 유족과 독지가들의 기부금을 보태 드디어 2006년 11월 12일 위령탑을 준공하고 제막식과 위령제를 거행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이 탑을 세운 뜻을 마음깊이 새기고 이 땅에서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는 화합과 평화의 민족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아울러 구천을 떠도는 원혼들이 이제 편히 잠들시길 빌고, 유족들에게는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면 한다. 2006년 11월 12일 영암군 금정면 6.25전쟁희생자위령탑건립추진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