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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자존의 공간, 심우장 한용운은 1933년 벽산스님이 집터를 기증하고 방응모, 박광 등 지인들의 도움으로 성북동 산자락에 심우장 자택을 지었다. 집을 남향으로 짓게되면 조선총독부와 마주보게 되므로 이를 반대하여 북향으로 지었다고 전해진다. 한용운이 심우장에서 기거하던 1930년대 중반 이후는 일본 제국주의의 극성기로 독립운동에 대한 강한 탄압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심우장을 지을 당시 한용운은 신간회 운영의 해소 이후 심혈을 기울이던 잡지 '불교'가 휴간되고, 한용운이 당시로 있었던 불교비밀결사대 만당 조직도 와해되는 등 상실감이 큰 시기였다. 최린, 최남선, 이광수 등 많은 지식인들이 친일로 변절한 것도 이 때의 일이었다. 그러나 한용운은 '심우'의 단계로 돌아가 민족의 나아갈 방향을 새롭게 모색하였다. 끝까지 일제와 타협하지 않았던 한용운이 머무르던 심우장은 민족 자존의 공간이자 일제강점기 마지막 남은 조선 따이었다. 하지만 한용운은 끝내 독립을 보지 못하고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6월 29일, 심우장에서 입적하였다. 1962년에는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 최고 훈장인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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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심우장 정면의 왼쪽 위편에 걸려 있는 나무현판은 일창 유치웅(1901~1998, 서예가)의 글씨이다. 원 현판은 민족대표 33인 중 한 명인 위창 오세창의 친필이 있었으나 원본은 없어지고, 1980년 즈음 만해사상연구회에서 일창 유치웅에게 부탁하여 다시 현판을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