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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서울에서 소남 김영현 백남훈선생등과 밀의하고 귀가하였든바 일경의 감시가 일익우심함으로 중국 간도 용정으로 망명 조선인학교에서 교편을 잡았으며 당시 소안면 진산리 박하국씨외 십수명의게 교수한 사실이 현재 동면 진산리 고 박하국씨 조국광복운동 기념비에 임재갑씨 사실이 약술되여 있음. 조선독립단체부를 심방코저 4백여리 노정을 보행도중 여비준비차 제초작업임금으로 정율을 구입해 포장에 담고 강물에 침수 엷은 돌 2개를 습득하여 하여 하나는 지상에 그 위에 서율포대를 배치 그 위에 엷은 돌을 배치한후에 돌이에 불을 피우며 자조 위치를 회전 그 밥으로 노숙하고 독립단본부를 탐방 탐산유곡으로 행보 수백일후 도착하니 입초자로부터 첩자로 오인하고 심한 구타를 당하였으며 인근호로 인치하니 첩자해골이 흡사 야적한 농가 토비양에 비등하였다한다. 지하호로 인치하니 5인의 본단간부가 치밀한 계획을 수립중이였으며 운동지시를 받고 간도용정으로 귀환도중 2인의게 포위되여 무수두타당한후 마대에 포장해서 투강하니 수중고훈 될것이 분명하였다. 유리하다 장도로 파대하고 주위를 성찰하니 행적이 묘연함으로 수영상륙하야 용정에 도착 동흥은진 대성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한편 만주에서 독립의용군의 후원에 국내의 비밀망을 동원하기에 심혈을 경주하였다. 1929년 3월 일 간도에서 광주학생사건 수습차 귀국 서울에서 송진우선생과 열의하였으나 내실을 거두지 못하고 귀가요양중 완도군수로부터 상군하라는 통지를 접하고 면담한즉 전남도 이재과로부터 본군에 탁주양조장 1건을 증설하니 임재갑의게 교부하라는 지시라함에 선생은 일제의 간계로 직감하고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든바 동지들로부터 자금조달에 필요하니 증락이 가하다는 권유에 완도읍내에 영업소를 설치하고 함북에서 동지 박아지 평남에서 동지 강경환선생등을 초빙하여 신지사립학교에서 교편을 잡게하였으며 일경 형사는 매일 24시간 양조장 출근으로 외부동지들과 연락불가함으로 양화 2족을 동일형으로 제조하여 구두창 내부에다 비밀연락문을 은닉하고 교환해 신고 퇴거하면 연락문에 의하여 여비